<이대학보 제1호, 창간호의 발자취를 찾아서>

 

  <편집자주> 1954년 2월12일, <이대학보>가 탄생했다. 하지만 본지의 첫 단추가 된 창간호의 행방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현재 학내에 남아있는 창간호 지면 원본은 이화역사관(역사관)에 있는 한 부가 유일하다. 보존 상태도 완벽하지 않고 군데군데 찢어져 있다. 참된 민주주의의 실현과 대학 공동체 내 소통을 목적으로 발행됐던 <이대학보> 창간호. 본지는 창간 60주년을 맞아 1465번의 기록을 거슬러 올라갔다. 학보의 근간이 됐던 창간호 원본의 내용과 발행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 이대학보 창간호 이도은 기자 doniworld@ewhain.net

 

△학내 언론의 시초가 된 창간호, 학내에 남은 원본은 단 한 부
  학내 유일하게 남은 창간호 지면 원본은 일반인은 관람할 수 없는 역사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본지 기자는 10일 오후3시 역사관을 방문해 창간호 지면 원본을 직접 확인했다. 원본은 현재 <이대학보> 지면보다 작은 타블로이드 판형(250mm×353mm)으로 모두 2장 4쪽으로 구성됐다.

  창간호의 원본은 훼손된 상태지만 <이대학보>가 본교 대표 언론기구로서 수행해온 역할을 평가하기에 귀중한 자료다. 이는 당시 문교부 김법린 장관이 보낸 창간호 축사에서도 나타난다. 축사에 따르면 김 장관은 “<이대학보>는 민주주의의 참된 실현을 위해 언론의 당위성을 밝히고자 하는 의도로 발간됐다”며 “이 신문이 우리의 언론계에 공헌하는 바가 크리라 생각된다”고 밝혔다. 당시 학생기자 신분으로 창간호 제작에 참여한 김호순 명예교수(국어국문학과) 역시 “창간호는 <이대학보>의 효시로서 학내 소식을 보도하는 대학사회의 공기(公器)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유명 시인의 기고 시부터 시대상 반영하는 기사까지 실려
  창간호에는 당대 시대상을 반영하는 기사, 광고 등이 실려 있다. 국내·외 각계에서 본교로 실험도구와 건축자재를 원조물자로 보내온 소식은 전쟁 직후의 당시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또 소설가 심훈을 ‘민족문학의 선구자’, 이광수를 ‘근대문학의 건설자’로 표현하며 그들의 작품전집을 홍보하는 광고를 통해서는 당대 유명 문학가들이 누구였는지를 알 수 있다.

  창간호 1면을 넘겨보면 한 면을 빼곡히 채운 사설이 눈길을 끈다. 이는 모두 본교 교수들이 기고한 사설로 ‘대학 국어 교육의 방향’, ‘원자력 이용 방안’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본지 1기 기자였던 김승숙 명예교수(영어영문학과)는 “창간호인 만큼 아직 기삿거리가 충분치 않아 사설로 한 면을 채웠다”며 “당시 주간교수였던 최완복 교수(불어불문학과)가 본교 교수들로 ‘사설위원회’를 조직해 매회 발행마다 사설을 기고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화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자 창간호에 시를 기고한 교수도 있었다. 창간호 2면에는 당대 유명 시인이었던 김동명 교수(국어국문학과)가 쓴 시 ‘이화송(梨花頌)’이 실려 있다. 이 시는 이화를 ‘배꽃동산’, 이화인을 ‘이화동산의 꽃’이라 칭하며 학생들이 본교에서 자신의 꿈을 실현해 나가길 염원하고 있다.

△창간호가 나오기까지, 쉽지만은 않았던 도전
  대학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언론기관을 지향했던 본지도 그 첫 발걸음은 순탄치 않았다. <이대학보>는 초대 주간교수였던 이석곤 교수(영어영문학과)의 제안으로 처음 만들어졌다. 당시 본교 출판부 부장을 맡고 있었던 이 교수는 학내 소식을 보도할 기구의 필요성을 느끼고 영어영문학과(영문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자 모집 공고를 냈다. 그러나 6.25 전쟁 직후의 혼란 속에서 기자를 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학생은 없었고 이에 이 교수는 영문과 학생 6명을 직접 호명해 이대학보 1기 기자단을 조직했다.

  마감 당일 웃지 못 할 일도 벌어졌다. 조판 작업을 하던 중 기사가 부족해 지면이 남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최완복 주간교수는 본교 비서실에서 교내 건물 사진 한 장을 받아 텅 빈 1면의 빈자리를 채웠다.

  창간호의 원본은 거의 사라졌지만 그 기억은 여전히 기자들에게 남아있다. 본지 1기 기자였던 김호순 명예교수는 “졸업식 당일 최 주간교수님이 학보사 퇴임 기념 선물로 비취 단추를 주셨는데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것을 간직하고 있다”며 “단추를 볼 때마다 학보사 기자였다는 것에 자긍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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