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정치적인 발언을 한 글이 있어요. 지워주세요.”

  학보사 3년 차, 편집국장 자리에 있으면서 종종 요청받았다. 예전에 학보에 기고한 글이 정치적이라며 수년이 지난 후에 삭제를 부탁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개인 블로그나 SNS에 기재된 글을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화의 역사가 들어있는 데이터베이스의 문제이기 때문에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이유를 물어보면 ‘취직에 불이익이 있을 것 같다’는 응답이 대부분이었다. 많은 학생이 취직 때문에 정치색을 포함한 자신의 가치관을 감추고 있다.

  우리나라 대학생에게 정치보다 취직이 우선이다. 민주화를 위해서 싸웠던 세대는 중년이 됐고, 다음 미래를 짊어질 세대는 먹고 살기 바빠졌다. 먹고 살기 급급한 세대가 선택한 정치색은 ‘중도’다. 이는 정치적으로 진보도, 보수도 아니라는 의미로, 2012년 대선기획의 하나로 본지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본교생 10명 중 4명은 자신이 중도라고 답했다. 이중에는 학점, 취업 등 눈 앞 현실에 쫓겨 정치적 판단을 보류하거나 포기하는 학생도 있을 것이다.

  ‘정치색 지우개’는 학내에서 가장 정치적인 집단인 총학생회(총학)에서도 나타난다. 정치적인 행동을 부담스러워 하는 학생들에 맞춰 예전보다 사회참여나 등록금 인하 문제에 온건하게 대응한다. 일부 대학에서는 아예 정치색을 배제하고 나서며 유권자의 지지를 호소하는 총학도 등장했다. 학생들의 관심사가 등록금 인하, 사회참여보다 가시적인 학생 복지에 모아지면서 대학 총학의 공약도 그에 발맞춰 변화하는 추세다.

  학생회 참여도 기피한다. 올해 모든 단과대학(단대)가 투표를 마친 것은 예상 투표 마감일보다 5일이나 지난 11월27일이었다. 이중 사회과학대학은 3년 연속 투표일을 연장하기도 했다. 대학가도 마찬가지다. 학생회 후보자가 없거나 투표율 저조로 선거 자체가 무기한 연장되거나 단일 선거운동본부 출마 등 학생회 운영 자체가 어려워졌다. 본교는 2년 연속 단일 선본이 출마했으며, 서울대 총학 선거관리위원회는 11월26일 제56대 총학 선거 최종 투표율이 약 28.3%라고 밝혔다. 서울대는 2003년 이후 11년 동안 투표율 미달 현상을 겪고 있다. 올해는 이 같은 현상을 타계하기 위해 전자 투표를 도입했지만, 작년 투표율인 약 27.8%에 비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본지는 2013학년도 종간호 1면에 이번에 선출되고 사진 게시를 동의한 학생 대표자 116명의 얼굴을 담았다.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할 학생 대표자이지만 이들의 얼굴이나 이름은 임기가 끝날 때까지 모르는 것이 태반이다. 이번 기획을 통해 이화인이 보다 학생 대표자에 가깝게 다가가고, 학생 대표자도 이화인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길 바란다. 적극적인 학생 자치 참여는 분명 긍정적인 변화를 만든다. 학생과 학생 대표자는 끈끈한 신뢰가 필요하다. 더불어 이번에 얼굴이 나오지 않은 학생 대표자는 또 다른 방법으로 학생과 소통할 방안을 마련하길 바란다.

  ‘하얀 고양이나 검은 고양이나 쥐만 잘 잡으면 됐다’ 식의 흑묘백묘론은 잡시 접어두자. 모르는 20대가 아니라 알아보는 20대가 되자. 고달픈 삶에 지쳐 일상의 정치를 피하고 실용주의 노선으로 갈아 탄 현재 20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가치관을 지우는 지우개가 아닌 자신을 믿는 데서부터 출발한 소신 있는 정치 참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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