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스와 로크: “인간은 평등하나 남녀는 평등하지 않다”
홉스와 로크: “인간은 평등하나 남녀는 평등하지 않다”
  • 김혜숙 교수(철학과)
  • 승인 201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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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속의 여자(4)


  근대 과학적 사고의 발달은 수태에 있어 암컷이나 수컷의 역할이 동등하다는 생각을 일반화시켰다. 이제 서양근대철학자들의 관심은 생물학의 영역을 떠나, 어떻게 사회나 국가가 성립하는가, 개인이 갖는 권리의 원천은 무엇인가와 같은 정치적 영역으로 옮아갔다. 우리는 스피노자와 같은 근대 초기 철학자 안에서 시대와 불화하면서까지 자신의 온존재로 인간의 자유, 개인의 자유를 지키고자 한 위대한 영혼을 만날 수 있다. 스피노자(1632-1677)는 그의 <<신학정치 논고>> 중 <자유로운 국가에서는 누구든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하는 대로 말한다> 장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만일 사람의 마음이 그들의 혀처럼 쉽게 제어될 수 있다면 모든 군주는 그 왕좌에 안전하게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자유로운 이성과 판단은 다른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

  근대 유럽의 철학자들은 개인이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고유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정립하기 위해 많은 지적 에너지를 투입했다. 로크(1632-1704)는 ‘모든 인간은 양도할 수 없는 신이 부여한 권리를 갖는다’고 생각했으며, 홉스는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서로에 대해 동등한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평등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생각은 칸트와 헤겔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정치적 이상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이들 철학자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지만 여자와 남자는 평등하지 않다. 근대철학자들은 여성의 정치적 권리 문제와 관련해서 난처한 처지에 처하게 되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평등한 존재가 아님을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 역설을 설명할 것인가?

  홉스와 로크는 매우 영리한 방식으로 이 역설을 해결하였다. 홉스(1588-1679)는 여성의 정치적 역할을 논한 첫 번째 근대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인간 본성에 관해 매우 현실적인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인간 행동의 원천은 이성이라기보다는 정념이고, 인간은 도덕적 동기에 의해 움직이기보다는 자기보존의 욕구 하에서 움직인다고 보았다. 여자와 남자는 자연 상태에서는 권력적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다. 자연에서 지배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아이의 탄생에서 비롯되는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예속 관계가 있을 뿐이다. 여자는 최초의 군주였다.

  인간은 성장하는 데 다른 동물과는 달리 긴 시간을 필요로 하므로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온갖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어머니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고, 이런 상황이 그의 모든 권리를 어머니에게 양도하도록 만든다. 이것이 여자가 최초의 군주인 이유이다. 그러나 이 군주의 지위는 곧 그녀를 위험에 빠뜨리게 하는데, 그것은 전쟁과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 여자는 아이를 돌보는 일이 어려워지기도 하고, 아이를 돌보는 일에 힘을 빼앗겨 자신을 지키기 어려워지 때문이다. 여기서 여성은 결혼이라는 시민법의 계약에 의존해 남성에게 속박되게 되고 여성은 군주의 지위를 잃게 된다. 남성이 국가를 건립하기 때문에 법은 남성에게 유리하게 되어있고 결혼을 통해 남성은 여성과 아이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게 된다. 여성이 자신의 위험에 대비해 든 보험의 대가는 평화롭게 넘긴 자신의 자유와 아이에 대한 소유권이었다. 홉스는 자연과 사회(국가)를 구분함으로써 남녀 불평등의 기원을 설명한 것이다.

  로크는 당시 휘그당 당수의 비서로 활동하면서 구질서를 깨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제시한 ‘개인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 개념은 미국의 기초를 놓은 토마스 제퍼슨에 의해 계승되어 미국 헌법에 심어졌다. 평등한 인권의 개념은 그러나 여자에게는 온전히 허용되지 않았다. 서로 간 투쟁의 상태로 보았던 홉스와 달리 로크는 자연상태를 평화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사회로 보았다. 이 개인들이 자연을 떠나 동의에 의해 계약을 맺고 국가를 형성하는 이유는 자신의 생명과 재산과 자유를 확실하게 지키기 위해서인데, 여성이나 하인들까지도 이 평등한 자유로운 개인의 범주에 두어야 할 것인가? 인간 평등론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남녀 불평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로크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구분하여 가정 내에서의 권력관계를 군신 사이의 정치적 권력관계와는 다른 종류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결혼관계 내 가족 사이에서 작동되는 힘은 정치적 힘이 아니라 혼인과 부부관계에서 비롯되는 힘(conjugal power)으로 비정치적 힘이다. 이 힘은 생명을 위협하는 힘이 아니라 단지 가장이 식솔을 거느리는 데서 성립하는 힘(가부장권)이다. 여성은 계약에 의해 이 지배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혼에 의해 이 지배권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사적 영역에서의 지배와 공적 영역에서의 지배가 다른 종류로서 사적 영역은 정치적 권력이나 정의의 영역 밖에 있다는 생각은 로크 이후 서구 정치이론 안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