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왕정사회에는 권력을 가진 인물이 자신의 힘을 사사롭게 쓰는 일이 빈번했다. 당시 권력은 개인이 사유(私有)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 권력은 공공을 위해, 즉 권력을 대표자에게 위임한 사람들을 위해 쓰여야 한다는 원칙이 확립되며 ‘공권력’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권력을 사유화해서는 안 된다는 이 원칙은 수많은 이들이 피를 흘린 대가로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학내에서부터 사회까지, 권력을 사사로이 개인 혹은 특정 집단을 위해 사용하는 관행은 여전히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필자는 취재 과정 중 권력을 의식해 사실을 말하기 꺼려하는 경우를 종종 봐왔다. 이들은 자의적으로 진실을 외면하기보다 상급자, 즉 권력을 쥔 자의 눈초리를 의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 취재원은 “자신의 의견을 보도하려면 익명을 사용해야 하고, 그게 아닐 경우 윗선에서 허락해줘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의사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하는 학내에도 이 같은 문제가 존재한다. 취재를 하며 학내 구성원을 두루 만나다 보면 학내에서마저 누군가는 권력을 가진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일이 빈번하다. 이때, 권력을 사용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학생들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높은 자리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취재 과정에서 일부 학과의 학생들은 사실에 관한 의견을 밝히기 위해 학생회, 더 나아가 교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현상은 비단 학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한국 정치사에서 역대 대통령이 걸은 길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익을 위해 권력을 이용한 대통령과 그의 친인척들이 법의 심판을 받았다. 낙하산 인사, 비자금 조성 등 불명예스러운 일로 철창신세가 된 권력자들을 심심치 않게 보지 않았나.
  최근 불거진 ‘대선개입’ 논란은 자못 심각한 상황이다.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국가기관이 대선에 개입했으며 대선 개표가 조작됐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권력을 위임할 대표자를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는 민주주의 시대에 이러한 의혹이 불거진 상황 자체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일이다. 이러한 시도가 사실이라면 이는 주권재민의 헌법 가치를 부정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현 시점에서 민주주의, 소통 등의 가치는 심지어 거창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러한 가치가 실현되는 것이 어렵다면 최소한의 ‘정의’를 세우는 공권력이 작동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 과정에 누군가에게 ‘정의’가 ‘부정의’로 작용하더라도 무엇이 정의인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회가 낫다. 최소한 권력의 올바른 사용법을 충실히 지키고 있으니 말이다. 국민이 대표자에게 부여한 권력을 사사로이 이용해 역사적 심판을 받는 악순환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

  공권력은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사용될 때 의미가 있다. 그러나 현재의 공권력은 누군가에게 ‘부정의’로 구별될 수 있는 원칙이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다고 상대방의 의견을 묵살하고 자신의 고집대로 일을 끌어가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더구나 이 과정에서 사익을 채우고자 하는 권력이 개입돼서는 안 된다. 하나의 큰 지향점 아래 서로 협력하고 서로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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