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우리 말 그리움의 동사형은 ‘그리다’인데, ‘그리다’의 어원은 ‘글’이다. 글의 본질은 그리움을 표현하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학자들은 ‘글’은 ‘말’의 어원이 같다고  보는데, 결국 인간의 언어는 그리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언어야말로 인간의 가장 특징적인 것인데, 언어의 본질이 그리움을 표현하는 데 있다면, 그리움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정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생산력을 담당하는 기술 언어를 가리켜 그리움을 표현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사람들은 언어의 본질을 테크네가 아닌 포이에시스 곧 시에서 찾았다. 시는 그리움을 표현하는 언어이다. 시뿐만 아니라 그림은 어떤가. 그림이라는 말 자체가 그리움을 표현하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고 보면 그림과 문학과 음악 같은 예술 활동이 모두 인간의 그리움을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과학적 개념 언어가 지배하고 있지만, 과거부터 인생의 진리는 은유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해 왔다. 은유는 이미 할 말을 다한 개념 언어가 아니라, 여전히 뭔가를 말하고 싶은 그림 언어이다. 그리움을 말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가을의 교정이 아름답다. 내가 프랑스 유학 시절에 멋있게 본 남자가 있다. 이브 몽땅이라는 가수이다. 내가 삼십 대 초, 이 분이 일흔 가까이 되어 피아노 옆에 서서 노래 부른 장면을 기억한다. 유명한 ‘고엽’(Les feuilles mortes)이라는 노래이다. 바람에 쓸려가는 낙엽을 보며, 사랑했던 옛 사람을 그리워하는 노래이다. 샹송이 대개 그렇듯이 그 가사가 아름답고, 곡도 아름답다. 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슬프면서 아름답다고 한다. 왜 슬픈 데 아름다울까? 미학의 세계는 그리움에 대해 얘기하는 세계이고, 그리움은 기쁨보다는 슬픔에 가깝기 때문일까?

  중세가 지나고 르네상스가 시작될 때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 때 만들어진 작품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이다. 죽은 아들을 무릎에 누이고 있는 젊은 마리아의 슬픈 얼굴이 절제된 표현으로 드러나 있다. 거룩한 성모 마리아가 인간적 슬픔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의 고통을 실감 있게 표현한 작품들도, 14세기 지나서 르세상스 시대에 집중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했다. 중세에는 하늘에 승천한 승리자 그리스도가 강조되었는데, 이제 십자가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예수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왜 슬픔을 제일 먼저 표현했을까?

  고달픈 삶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슬픔이 그리움에 가장 가까운 감정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학에 가장 가까운 정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움은 감정 이전에 감정을 산출하는 존재의 구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그리움의 대상은 무엇일까?

  그냥 뭔가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하는 게 나을지 모른다. 물론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할 수도 있고, 죽은 부모를 그리워할 수도 있고, 지나간 좋은 시절을 그리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술에 표현되는 그리움이 특별히 대상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연인이 없는 학생들이 ‘고엽’을 들으며 느끼는 그리움은 누구를 향한 것인가? 대상이 없는 그리움의 대상. 그건 나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참 자아를 그리워한다고 해야할지도 모른다. 하이데거라는 철학자는 말했다. “나는 나에게 존재적으로 가장 가깝지만, 존재론적으로 가장 멀다.” 나는 누구보다도 나에게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참 나는 남보다도 나에게서 멀다는 얘기이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존재. 그것이 나라면, 인간의 그리움은 나를 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나님도 참 나의 자리에서 내 그리움의 대상인지 모른다. 그래서 그리움은 인간의 모든 문화와 문명의 원천이고, 에너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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