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TV광고를 보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한 남자가 직장에서 겪는 고초를 그려낸 뒤 ‘속 쓰림엔 ○○위장약’이라는 카피문구를 내보내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광고 속 남자의 고통에 공감하기보다, 그 고통을 야기 시키는 사회구조적인 원인과 문제들을 모두 개인에게 감내하게하는 잔인한 세상의 단상을 본 듯 했다.

  이제 사회 속에서 개인이 받는 피로는 ‘질병화’된 듯하다. 날이 추워지면 걸리는 흔한 감기처럼, 스트레스라는 감정은 이제 감내의 대상이 되기보다 약을 필요로 하고 육체적인 증상을 수반하는 것으로 심화되었다. 더군다나 이러한 증상에 일반적으로 상용화되는 위장약과 그것을 제조, 광고하는 제약회사 또한 이 현상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레이 모이니헌·앨런 모이니헌이 공동집필한 저서 <질병 판매학>에서도 제약회사의 이러한 일면을 지적한다. 책에 따르면 세계 굴지의 다국적 제약 회사들의 마케팅 전략은 현재 공격적으로 ‘건강한 보통 사람들’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 약을 필요로 하는 질병 환자들은 소수이기 때문에 구매고객의 범위를 넓혀 더 높은 수익률을 올리려 하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일시적 감정의 기복은 정신질환의 하나로 둔갑되고, 누구나 경험하는 흔한 증상조차 무시무시한 질병의 전조 증상으로 변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제약회사의 상술만으로 ‘위장약 권하는 사회’의 일면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나는 우리 사회가 약간 이데올로기가 경직되어있는 상태에 놓여있다고 본다. 사회적 불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거나, 문제에 대해 경각심을 갖는 것이 소극적인 우리의 태도는 아마도 식민의 역사와 잦은 전쟁으로 남은 흉터자국 일수도 있다. 의견을 말할 때 빨갱이, 이단아 등으로 치부되는 경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시위에서 맛본 과잉진압의 역사, 폭력과 희생에 대한 두려움 등은 우리에게 제 목소리를 말하기엔 그보다 더 큰 희생이 뒤따른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각인되어왔다. 때문에 구태여 무언가에 대해 큰소리 내어 말하기보단 이를 악물고 삼켜내고 버틴다. 정당한 사회를 위하는 의지보단 억압에 대한 피해의식이 생긴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사회에 대한 기대치가 많이 낮아져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도 ‘언제 정상이었냐는 듯’ 치부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의 시선은 곪아 터진 세상에 대한 빈정과 무의식으로 번져있었다. 더더욱 감정은 은폐되고 외부에 대한 멸시와 내적인 피로만 쌓여간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여기서 사회는 개인의 책임을 더 요구한다. 불합리한 세상의 미미한 변화에 비해 개인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채찍질을 해야만 하는 입장에 놓여있다. 사람들은 숱한 자기계발서, 지나친 스펙·성과주의, 과잉활동과 과잉자극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기보단 낙오에 대한 두려움이 더 앞서 오늘도 자신을 갈고 닦는 것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이미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꾸어야 가까스로 사회에 편재될 수 있는 사회 구조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셈이다.

  생명은 늘 숱한 변화와 흐름의 과정 속에 있다. 인간의 면역 세포는 매일 3000여개씩 만들어지는 암세포와 투쟁하고 저항하며 육체의 싱싱함을 시켜낸다. 우리 역시, 사회의 억압과 시련에 맞서 도전하고 늘 저항해야만 우리가 가진 푸른 생명력이 자라고 활동할 것이다. 혈액이 돌지 않는 살은 괴사되듯, 우리의 문제가 내부에 고여 있다면 그것이 부패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의지가 피상적인 투정보다는 적극적인 행동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저항으로부터 발생할 상처를 감내하면서까지 생동감을 지켜낼 용기를 내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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