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이번 호부터 김혜숙 교수(철학과)의 학술연재 ‘철학 속의 여자’를 5주간 연재합니다.

  영어에 ‘oxymoron’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둥근 삼각형’처럼 모순된 말을 가리킨다. ‘생각하는 여자’ 또한 그런 모순 어법처럼 받아들여진다. 칸트는 라틴어를 하는 여자는 콧수염을 기른 여자와 같다는 말도 했다. 21세기가 된 오늘날 한국사회 안에서도 공부 많이 한 여자, 복잡한 생각을 하는 여자는 결혼시장에서 경쟁력이 없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철학과 여자, 사유와 여자, 이성과 여자, 논리와 여자는 어째 잘 어울리지 않는 개념 쌍이다. 서양의 지적 전통 안에서 철학은 모든 학문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출현한 철학은 오늘날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것에 관한 이론’으로서, 단지 현재의 분과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천체물리학, 수학, 정치학, 심리학 등을 모두 포괄하는 일반학이다. 그런데 이런 위대한 지적 전통 안에 여자는 어디에 있는가? 수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동아시아 지적 전통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여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자기가 부재하는 전통, 자기가 소외된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은 편하지 않다. 나아가 자기를 끊임없이 비하하고 있는, 혹은 비하할 것을 암암리에 요구하는 텍스트를 읽는 일은 여자들에게 분열증마저 일으킨다. 여자로 인간의 역사 안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우리는 명료하게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여성적 자의식을 갖는 일은 자신 안의 여성을 긍정하고 사랑할 수 없도록 만드는 전통 안에서 삶을 구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사 안에서 최초의 여성철학자로 알려진 히파티아(Hypatia) 이야기로 모순어법에 관한 첫 번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4세기 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박물관 내에는 여러 개의 독립적 학당들과 도서관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테온(Theon)은 수학교수로 일하고 있었고 그녀는 아버지에게서 철학, 수학, 천문학을 배웠다. 그녀는 뛰어난 능력으로 400년에는 신플라톤주의 학당의 장으로 일하게 되었고 멀리에서까지 그녀의 명강의를 듣기 위해 학생들이 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녀는 아버지를 도와 프톨레미에 관한 주석을 만드는 일에 관여하기도 했고 유클리드 원론(Elements)의 새로운 판본을 만드는 일을 하기도 했다. 이들이 만든 새판본은 이후 발행된 다른 모든 판본의 기초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에는 기독교 세력과 비기독교 세력 사이의 알력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녀의 천문학적 지식은 기독교적 세계관과는 배치되는 것이었고, 기독교인들로부터는 이교도로 비난받았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시릴(St. Cyril)은 히파티아와 가까운 친분을 가졌던 알렉산드리아의 로마집정관 오레스테스(Orestes)와 심한 정치적 갈등상태에 있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고 사람들에 대한 그녀의 영향력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녀의 영향력을 두려워했던 기독교 광신도들은 어느 날 자신의 마차를 몰고 가던 그녀를 공격했다. 조개껍질로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히파티아는 그 주검마저 처참한 방식으로 훼손당하여 길거리에 조각조각 뿌려지기도 하였고 남은 부분들은 도서관에서 불에 태워졌다. 이것이 415년의 일로 기록되어있다. 

  히파티아는 여성적 복장을 거부하고 남성 철학자와 교수들의 복장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유롭게 도시를 걸어 다녔고 스스로 마차를 몰고 다녔다. 교수로서의 정신적 자유를 지키기 위해 독신으로 살았다. 히파티아의 죽음은 종교와 과학의 갈등, 교회와 국가와의 갈등 안에서 빚어진 것이었지만, 서양 중세의 반계몽주의와 마녀사냥의 전조처럼 보이기도 한다. 남성들이 규정한 여성의 역할에 안주하지 않았던 여자, 여자의 옷을 입기를 거부했던 여자, 남성들이 선을 그어놓은 집안의 울타리를 벗어나 거리를 활보했던 여자, 결혼을 거부하고 정신의 자유를 선택했던 여자, 세계를 권위와 신화에 의해 보기보다 논리와 합리성에 의해 이해하고자 했던 여자, 그러나 남성의 옷을 입어 스스로의 여성을 거세할 수밖에 없었던 여자가 됨으로써 히파티아는 존재 자체가 모순어법이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자료들은 7세기 지역을 접수한 아랍인들의 목욕물을 데우기 위한 땔감으로 사라져버렸다. 히파티아의 작품들 또한 사라졌다. 그녀에 관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기록 안에서 단편적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작가의 상상력 안에서 재탄생한 히파티아를 ‘아고라(Agora)’라는 영화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지적인 여성에 대해 적대적인 문화에 맞서서 사는 여자의 삶이 지니는 아름다운 위험이 잔인한 죽음의 여운과 함께 깊은 슬픔을 남긴다. 얼마나 많은 젊은 히파티아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여성들에게 잔인한 문화 속에서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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