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의 예술가, 모방을 통한 창작으로 진본을 넘어서다
반도의 예술가, 모방을 통한 창작으로 진본을 넘어서다
  • 박선영 기자
  • 승인 2013.1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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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수의 엘리트 계층만이 이해하는 몬드리안의 그림이 아닌 전 세계인이 알아보는 ‘코카콜라’가 현대세계의 보편적 상징이 되었다.”

  미학자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Mary Anne Staniszewski)는 그의 저서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Believing is seeing)」에서 모방 예술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긍정한다. 예술의 독창성이 라는 ‘오만함’에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의 걸작이나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차용해 저항한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오지 사람이 피카소만의 독창적인 작품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세계적으로 차용되는 코카콜라 상표 이미지는 알아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모방의 예술을 기성 순수미술보다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본교 교정에서 모방의 미학을 예찬하는 전시가 펼쳐진다. 이화100주년기념박물관(박물관)이 10월16일 특별기획전 ‘모방의 미학(The Aesthetics of Imitation)’을 개최했다. 이번 전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술에 있어 창작의 모티브가 된 모방을 한국 전통미술과 현대미술이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살펴본다. 12월31일(화)까지 ‘한국미술 속의 모방과 창조’전, ‘현대미술, 원본에 도전하다’전을 박물관 2층 기획전시관과 현대미술전시관에서 각각 만나볼 수 있다.

△한국의 전통작가, 모방을 통해 ‘원본’으로부터 배우다

  한국 전통 문인이나 화원은 원본을 모방해 기본기를 쌓은 후 독자적 그림 세계를 구축했다. 무명 민간 화가는 상류층만 향유하던 고급 예술품을 모방해서 대중의 취향에 부응했다. ‘한국미술 속의 모방과 창조’ 전은 이러한 모방의 흔적을 담고 있는 회화, 공예, 복식 유물을 통해 고려시대부터 근대기에 이르기까지 모방의 의미를 살펴본다.

▲ '한국미술 속의 모방과 창조'전 기획전시관에 있는 전통 활옷 김가연 기자 ihappyplus@ewhain.net

  2층 기획전시관을 들어서면 화려한 전통 활옷이 전시실 정중앙에 복원돼 있다. 활옷 앞에는 동양화 2점이 벽에 걸려있다. 신부가 결혼 전 치장하는 모습을 그린 ‘신부성적도’와 다소곳이 기둥 앞에 서 있는 여인을 표현한 ‘미인도’다. 두 그림 밑에 놓인 인물문 접시(인물을 그린 접시) 2점에 그림의 여인이 똑같이 그려져 있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 온 김은호, 이중섭, 장은호 등 유명 화가의 그림을 작가의 제자 및 후배 화가들이 모방해 그리고, 대한도기주식회사가 이를 그릇으로 만들어 1950년대 유통했다.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전통 회화, 혹은 천재 한국화가의 그림을 ‘그릇’이란 액자를 통해 생활 속에서 누구나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음 전시실로 넘어가면 ‘청동정병’, ‘운룡문 호(구름에 쌓인 용이 그려진 항아리)’, ‘청화백자’ 등 공예작품의 향연이 펼쳐진다. 고대부터 동아시아 지역 간에 교류가 빈번히 이뤄져 왔기 때문에 도자기를 포함한 각종 공예에서 그 모방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재료로 제작된 같은 형태의 공예품들을 통해 공예기법 간의 모방도 엿볼 수 있다.

  왕실 생활에 사용됐던 화려하고 품격 있는 회화와 복식 등 예술품은 양반 계층뿐 아니라 대중도 향유하고 싶은 모방의 대상이었다. 옆 전시실에 ‘고급문화의 모방과 향유’를 주제로 무명의 민간작가가 그린 작품이 전시돼 있다. 약 2m의 폭을 자랑하는 ‘청룡도’와 그 옆에 나란히 전시된 폭 약 1.5m의 ‘운룡도’는 시선을 압도한다. 궁중 기우제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좌측의 청룡도는 위엄 있고 상서로운 느낌을 주는 반면, 오른쪽에 걸려있는 운룡도 용의 얼굴에는 익살과 해학이 넘쳐 친근하다.

△현대의 한국 작가, 모방을 통해 ‘원본’에 도전하다.

  ‘현대미술, 원본에 도전하다’ 전에서 전통 미술에 과감히 도전하는 한국 현대 화가도 만나볼 수 있다. 이들은 명화 이미지를 자신의 작품에 도입해 원작에 경외심을 표현하거나, 걸작이라는 아우라에 도전하며 미술계 내에 존재하는 문화적 권력구조에 대한 비판의식을 드러낸다. 또한 서양의 명화 이미지와 동양적 조형요소를 결합시키거나 동양 걸작을 서구적 방식을 표현함으로써 동서양의 문화 경계를 넘는 보편적 감성을 표출하기도 한다.

  현대미술전시관 초입에는 서양의 고대 신전에서나 볼 법한 조각상이 전시됐다.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 ‘줄리어스 시저’가 투구를 쓴 모습을 조각한 이광기의 ‘뉴리메이크’ NO.5’다. 조각상은 깨진 화분을 접착제로 이어 붙여 놓은 듯한 모습이다. 작가는 3분30초의 비디오로 복제한 조각상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순 후 다시 접착제로 붙이는 과정을 보여준다. 각각 다르게 조립된 5개의 조각상에서 원본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원본에 도전하는 작가의 도전의식을 엿볼 수 있다.

  전시실 우측 벽에 걸린 배준성의 렌티큘러 ‘화가의 옷’에서는 올림머리를 한 여성 화가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여주인공이 그려진 그림 액자 앞에서 등을 보인 채 앉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초등학교 시절 방향에 따라 그림이 바뀌는 책갈피를 연상시키는 까칠까칠한 재질이 특이하다. 작가는 어느 위치에서 화가를 보는가에 따라 화가가 검정 드레스를 입은 여성 또는 전라의 한국 현대 여인으로 보이게끔 표현했다. 각도에 따라 사물이 달리 보이는 ‘렌티큘러(Lenticular)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 작품은 관객의 시선에 따라 사람들이 기존의 고정된 사회 제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을 경험하도록 이끈다.

  전시관 오른쪽으로 난 통로를 지나자 마릴린 먼로, 그레이스 켈리, 엘리자베스 여왕 2세 가 벽면을 채우고 있다. 김동유의 ‘이중 이미지’ 연작이다. 작품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이 그림들이 사실은 각각 작은 존 F. 케네디, 클라크 게이블, 다이애나 그림이 반복된 채 조합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로 다른 이미지들이 만나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과정을 통해 작품의 부분이 독자적으로 하나의 단위를 이루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10월23일 특별전을 찾은 한양대 손기주(사학‧11)씨는 “평소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에 관심이 많아 이 전시를 찾았다”며 “모방과 복제 미술로 익숙한 앤디워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의 작품이 이번 전시회를 통해 다시 한 번 모방되며 재창조됐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