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을 찾는, 비결 아닌 비결
나의 길을 찾는, 비결 아닌 비결
  • 박윤정 교수(식품영양학과)
  • 승인 201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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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학기도 반이 흘렀다. 졸업을 앞둔 학생들에게 그러할 테지만, 이화에서 연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내게도 가끔은 이 시간의 흐름이 숨통 조이듯 다가온다. 중간고사가 있는 이 시간, 몇 날 밤잠을 설쳤는지 모를 퀭한 모습으로 지나다니는 학생들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과목도 또한 그 무게를 더했으리라 생각되어 마음이 짠하다가도, 문득 그 중 몇몇은 시험 때문에 이것저것 공부를 하다 보니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즐거움에 맛을 들이지 않았을까 내심 욕심을 내어본다.

  3, 4학년이 주로 듣는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 이런 학기에는 유독 졸업을 앞둔 이들의 고민과 한숨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학생들로부터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선생님은 어떻게 선생님의 길을 찾으셨나요?’ 혹은 ‘그 길이 선생님의 길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셨나요?’라는 것이다. 돌아보면 나에게도 익숙한 고민이 아닌가. 나 또한 20년 전 어느 가을날 팔복동산이나 도서관 앞 숲에서, 혹은 학교 앞 주점에서 친구와 주머니 털어 소주 한 병에 김치찌개 하나 시켜놓고 이야기하던 고민이 아니었던가. 그 속엔 진로를 정한 누군가를 막연히 부러워도 하고, 혹여 선생님들과 선배들의 이야기 중 무엇 하나 놓칠세라 학교 안팎의 모임들을 구석구석 헤매던 나도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언니에게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으니 진로 걱정 없어 좋겠다고 철없이 부러워하던 날, 내게 돌아온 한마디는 “너의 고민은 앞으로의 직업이 정해진다고 끝나는 것은 아니야.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지만 붓을 쥐고 있지 않은 순간엔 길을 찾아 헤매는 너와 같아.”였다. 이해가 될 듯 말 듯하던 그 말은 지금도 어딘가 숨었다가 내가 길을 찾아 헤맬 때마다 종종 출몰하곤 한다. 연구의 방향이나 가르치는 일을 고민해가며 하루를 지내는 지금도 진로를 고민하던 때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을 뿐.

  나의 이십 대는 어느 길을 가야 하는지 몰라 여러 갈래 길들을 시도해보는 시기였다. 말이 좋아 시도이지, 참 다른 이 길 저 길을 헤집고 다니지 않았던가. ‘이 산이 아닌가 보다’하고 수없이 돌아내려 오기도 하고,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이 또 시간 낭비가 아닌지 두려워 발걸음 내딛지 못한 날도 있었다. 4학년 1학기 어느 날 청강하던 수업에 지금은 ‘화차’라는 영화로 이름이 알려진 변영주 감독님이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기회가 있었다. ‘낮은 목소리’라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에 대한 영화의 부족한 제작비 마련을 위해 학생들에게 지원을 호소하였다. 사람 누구에게나 ‘잘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데 본인은 세 가지가 모두 영화를 만드는 것에서 충족되니 행복한 사람이라며, 좋은 영화를 만들겠다고 설득하시던 그 열정은 열심히 모아오던 나의 유럽여행 경비에 기분 좋은 구멍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때 겨우 서른이 되어가던 그분이 왜 그리 나이가 많고 무모해 보였는데도 감동적이던지, 저렇게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하면 후회는 작겠구나 막연히 배웠던 것 같다.

  그 후 나 또한 그분의 나이가 되었을 무렵 운 좋게도 내 평생 하고 싶은 일을 만나 지금의 길을 걷고 있지만, 내가 나의 길을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 그 때까지 내가 시도했던 다른 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중한 깨달음은 오랫동안 헤매며 걸어온, 항상 돌아내려 왔다고 후회했던 그 길들 하나하나가 이제 와 돌아보니 다 내 길이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연구의 길이 학생들에게는 잘 닦여진 한 갈래의 길처럼 보이겠으나, 내가 수없이 오르내린 그 작은 낯설고 작은 길들이 결국은 지금의 이 길로 이어진 나의 길이었다는 것을 모르리라. 또한 화가인 언니가 20년 전에 말했듯이 나의 길을 가고 있는 지금도 진로를 정할 때만큼이나 순간순간 고민을 하며 걷고 있음을.

  그리하여 진로를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무작정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만큼 나는 용감하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잘못 가고 있는 길인지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낯설어 보이는 이 길도 걷고 나면 모두 나의 길 중 일부가 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지금 심장이 뛰는 일을 하고 있다면 잘못 가고 있는 길인지 두려울 필요는 없다는 것을, 가을로 가는 길목에서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