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최근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전체적인 다리길이에 비해 종아리가 짧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소녀시대 유리의 공항패션 기사 댓글 중 ‘종아리가 짧아서 다리가 예쁘지 않다’는 것을 읽고부터 필자의 관심은 온통 종아리에 쏠렸다. 22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종아리의 비율에 대해서 자각을 한 것이다. 매일 힐을 신을 수 도 없고, 종아리를 잡아 늘릴 수도 없고, 보톡스로 종아리 둘레를 줄여 더 길어보이게 하기는 겁이 나고, 그대로 놔두자니 다리가 너무 신경이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주를 고민하던 차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종아리 길이는 그대로인데 왜 지금에서야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지 의문이 생겼다.

  생각해보면 옛날에는 비율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그저 날씬, 보통, 통통이 몸매를 설명하는 기준으로 그 역할을 다 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44사이즈 열풍이 불기 시작하더니 S라인, V라인 등의 몸 모양을 형상화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꿀벅지, 개미허리, 각진 어깨 등 상세한 신체 특정부위를 언급하며 ‘예쁘다’, ‘예쁘지 않다’를 논하고 있다. 심지어 허리-골반 비율, 허벅지-종아리-발목비율, 키에 따른 이상적인 신체 사이즈 같은 구체적인 수치까지 언급될 정도로 그 어느 때보다 ‘몸’에 적용되는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세분화되고 엄격해졌다. 건강하고자 살을 빼는 것을 넘어 몸에 칼을 대야하는 혹은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고칠 수 없는 부분까지 획일화된 미(美)기준에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현대인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몸’이란 무엇일까. 플라톤은 절대미(美)인 ‘미의 이데아’가 존재하며 완전한 미는 관념일 뿐이고 인간은 이를 불완전하게 모방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완벽한 비례와 대칭을 가진 몸이야 말로 아름다운 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완벽한 비례와 대칭을 이룬 몸만을 아름답다 하지 않는다. 새 생명을 잉태한 산모의 배, 세월이 지나 굽어버린 할머니의 등, 몸통만큼 커다란 아기의 머리……. 어린 시절 필자의 눈에 가장 예뻤던 친구는 몸도 통통하고 얼굴도 까무잡잡했다. 그 때는 그 친구의 따뜻한 분위기와 환한 미소가 정말 예뻤지만 지금의 기준으로는 그 친구는 예쁘지도 않을 것이고 여러 신체 결점들이 먼저 눈에 띌 것이다.

  요즘의 기준에 완벽하게 맞는 몸을 가진 사람이 전체 인구 중에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아마 몇 명 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완벽한 신체를 가졌다고 말하는 연예인, 모델들도 나름대로 자신이 생각하는 신체 결점이 있다. S라인, V라인, 골반라인 등의 기준은 끊임없이 신제품을 출시하고 그 제품을 소비자에게 어필해야 하는 뷰티, 패션업계에 의해 더욱 부풀려지고 세뇌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대상이 연예인이든, 일반인이든 이런 기준을 들이대며 결점 찾기를 계속해봤자 남는 것은 더욱 더 낮아지는 자존감과 늘어나는 신체 콤플렉스뿐 일 것이다.

  결국 획일화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지금의 세태에서 우리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자신을 가꾸되 그 행위가 내 몸이 싫어서가 아닌 내 몸을 사랑해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진정으로 자신의 몸을 사랑하고 온전하게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타인도 바른 시각으로 왜곡 없이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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