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 역 앞의 한 과일 노점에서는 여러 과일을 판다. 철마다 파는 품목이 달라지는 노점상이지만 여름 내 기다리는 과일이 있었다. 시원한 수박도, 달콤한 포도도 아닌 모과. 늦여름이 되면 조용히 등장하는 모과는 과육이 너무 시고 떫어 설탕절임이 아니고서는 먹을 수 도 없다. 외국에서는 마르멜로(marmello)라 불리는 이 이상한 과일은 단단한 과육 때문에 얼린 후 녹여 부드럽게 해서야 잼, 푸딩 등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과일 아닌 과일이다. 그럼에도 여름 내내 모과를 기다려온 이유는 그 특별한 향에 있다. 초록빛의 모과가 노오랗게 익어가는 동안 풍기는 그 향은 늘 감정을 아찔하게 한다.

  모과에 대한 첫 기억은 꽤나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초등학교도 다니지 않던 어린 시절 누군가가 집에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모과를 선물했다. 엄마는 TV위와 테이블에 그 모과를 바구니에 담아 놓아뒀다. 처음에는 “먹지도 못하는 것을 둬서 무엇에 쓰느냐”고 썩은 냄새가 나게 될까봐 걱정했다. 하지만 시나브로 변해가는 색만큼 진해지는 그 향기를 오며가며 끊임없이 맡게 됐고, 밤낮으로 조용히 퍼져있는 이 노란빛 향기는 어느 순간인가 부터 필자에게 가을의 신호가 됐다. 그 이후로도 모과는 종종 기억 속에 등장했다. 매년은 아니지만 잊을만하면 등장하는 단골손님이었던 것이다.

  모과의 향은 은은하다. 어디에서도 튀지 않는 은은함이 매력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짙어지는 그 향에 취해 헤어 나올 수 없게 된다. 세상의 그 어떤 향수보다도 매력적인 향을 가진 과일. 푸른 모과가 노랗게 익어가는 과정에서 향은 더 짙어진다. 집 한구석에 놔두었을 뿐이지만 온 집안에서 은은한 모과향이 날 정도다. 게다가 노랗게 익은 모과를 얇게 저며 꿀이나 설탕에 재운 모과절임 한 병이면 가을, 겨울의 감기도 무섭지 않다. 달콤한 맛 사이로 살며시 느껴지는 모과의 향이 어느 때 보다도 포근하게 느껴진다. 모과의 잊을 수 없는 가을의 맛, 그 향 하나를 기다리며 더운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모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은은한 향을 풍기며 오랫동안 곁에 머무는, 잊으려 해도 쉬이 잊을 수 없는 늘 그리워지는 사람. 언젠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꼭 모과를 선물할 것이다. 당신에게 모과 같은 사람이 되겠노라고, 항상 은은하게, 오래도록 따뜻한 사람으로 남겠다는 마음을 담아 당신에게 선물할 것이다. 사과처럼 예쁘지도 복숭아처럼 부드럽지도 않지만 누구보다도 좋은 기운으로 당신의 곁에 머물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오랜 시간이 지나 계속 옆에 남아있지는 못하더라도 그만큼 진한 향수가 되어 항상 기억속의 희미한 미소를 이끌어 내는 존재로 남겠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자신에게 하는 약속이자 그 사람에게 주는 마음일 것이다.

  생활환경과학관 왼편의 무성한 나무들 사이에는 모과나무가 몇 그루 있다. 지난주 수업을 마치고 걷다 그곳을 보니 주먹만 한 파란 모과가 여러 개 매달려 있었다. 곧 노랗게 변해 향긋한 내음이 나겠다는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기다리던 가을이 오고 있다. 모과는 언제까지나 가을의 맛이자 다짐의 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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