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늘상 하는 팀 프로젝트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분리된 현대 사회의 축소판이다. 팀 프로젝트는 일 하는 ‘기능’들의 모임이지, 관계 맺는 ‘사람’들의 모임은 아니다. 대부분의 팀플은 ‘기능적 합체’다. 팀 프로젝트 모임을 할 때, 학생들은 프레젠테이션 제작, 발표 등을 각자 최대한 균등히 분담하고, ‘효율적’으로 일을 하고자 한다. 이 것은 사실 ‘합리적’이며 ‘이성적’이다. 모두 바쁘니까. 그래서 특별한 이유 없이 다른 사람 보다 일을 덜 하거나 혹은 자신의 일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은 ‘민폐’가 되고, 나쁜 인상을 주게 된다. 그 것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민폐’로 낙인찍히면 그는 ‘대체’되었으면 하는 존재가 될 테니까.
  무책임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배터리 충전만 되면 업무를 무한 반복하는 로봇이 아니다. 인간은 때로 지친다. 치유를 의미하는 ‘힐링’ 이라는 단어가 한국 사회에서 지겹도록 쓰이는 것은, 압축 성장을 하며 쉬지 않고 달려온 한국 사람들이, 자꾸 ‘기능’ 으로서만 사느라 자신을 억압했기 때문일 것이다.

  1학년 때 들었던 <현대 문화와 기독교> 수업 내용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한국의 ‘풍요 속의 우울’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칸막이화’ 된 현대 사회에서, 각 영역에서 기대되는 가치가 이분 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적 영역에서는 효율적으로,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계산하고 계획해야 한다. 개인의 책임 완수에 방해가 되는 모든 이유는 변명이 되고, 일터에 끼치는 ‘민폐’가 된다. 그래서 사람이 더 싸고 더 전문적인 사람으로 언제든 대체 가능한 ‘기능’ 으로 여겨지는 공적 영역에서 생존하기 위해, 사람들은 최대한 마음을 누르고 이성만 킨 상태에서 쉼없이 일한다. 혹여 ‘민폐’로 낙인 찍혀 대체되면, 사랑하는 주변인들에게는 또 다른 ‘민폐’가 아닌가. 열심히 일하다가 한 순간 무능력한 벌레가 되어버리자 가족에게 버림받는,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를 생각해 보라.

  사적 영역, 즉 가정에서는 일터에서 지쳐서 돌아온 사람들을 위해 돌봄을 제공 해야 하는데, 그나마 전통적으로 사적 영역에서 사랑과 돌봄을 담당해 오셨던 엄마들도, 경제난 혹은 자아실현 때문에 많이들 일하신다. 그 결과, 모두가 ‘엄마’를 바란다. 그러나 밖에서 일하고 온 어머니에게 집에서도 돌보라고 하는 것도, 힘들 때 마다 누군가에게 징징대는 것도 민폐다. 공적 영역, 사적 영역에서도 민폐 끼치지 않기 위해 백조처럼 겉으로는 우아하게 그러나 수면 아래에서는 발버둥 치는, 겉과 속이 다른 삶이 그 놈의 ‘힐링’ 을 부르짖는 많은 어른들의 일상이다. 그러나 어른도, 때론 아이같이 마음껏 민폐를 끼치고 싶을 때가 있다. 돌봄이나 휴식을 요구해야 할 때가 있다.

  공적 영역에서의 책임감이나 합리성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각자 다른 가치로 분리되고, 민폐 끼칠 영역이 없어서 모두가 피로하여 힐링을 바라는 사회가 이 사회라면, 우리의 책임감과 합리성이 혹시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지 돌아보자는 것이다. 이 ‘민폐 억압적 사회’를 개선하기 위한 새로운 제도와 가치관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제 의식을 공유하는 개인들에게서 나온다. 엄한데서 힐링 찾지 말고, 나와 주변 사람들의 피로와 괴로움에도 귀를 귀울이고 돌보아 보자. 그리고 만약 그들이 지쳐서 나에게 공적 혹은 사적 영역에서 민폐를 끼치더라도 한 번 쯤은, 넉넉하게 넘어가 보자. 나도 한 번은 ‘민폐 덩어리’가 되어 보자! 민폐를 받아주는 넉넉함이 이 아픈 사람들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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