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2-14일 본교 생활관 소극장에서 <이갈리아의 딸들> 이라는 연극을 했다. 이 연극은 <이갈리아의 딸들>이 보여주는 세계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십개월’이라는 모임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은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정 반대인 가상의 세계 ‘이갈리아’가 배경이다. 작가는 이 안에서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를 상상에 풍자를 더하여 표현한다. 이 세계에서는 하나님도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 이해하기 쉬운 예다. 십개월은 이를 현대적인 시선으로 재해석하여 보여준다.  연극 <이갈리아의 딸들>은 별 기대 없이 갔던 내게 큰 만족을 줬다. 구성과 연출이 탄탄했고, 문제의식이 잘 드러났기 때문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페트로니우스를 말과 행동으로 몰아세우며 그를 둘러싼 가면들을 쓴 사람들이 정면을 바라볼 때다. 순간, 무대 위의 문제가 밖으로 나와 현실이 되었다. 문제가 현실이 되자, 페트로니우스의 괴로움을 방관할 수 없다고 느껴졌다. 정면을 보는 가면과 눈이 마주쳤을 때 나도 페트로니우스를 고통스럽게 하는 공범 중 하나이거나 나 자신이 페트로니우스가 된 것 같아서다.  감상은 이쯤 해두고 연극 <이갈리아의 딸들>이 제시하는 문제의식을 생각해보자. ‘이갈리아’라는 세계에서 바로 드러나는 문제점은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바꾸면서 남성과 여성의 위치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현상이다. 이 현상 안에서 느껴지는 낯설음은 연극 내에서는 웃음의 요소로 사용되었지만 웃으면서도 ‘내 앞에 앉아있는 저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웃을까?’ 생각하게 만들어 씁쓸함을 준다.

  이 문제점 내에서 십개월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부분은 ‘말’이다. 말이라는 것은 가볍지만, 인간의 사고를 표현함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다. 이는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어떤 개체에 대한 ‘정의’와 ‘규칙’이 제시된다는 의미다. 이를 뒤집어보면 인간의 ‘정의’나 ‘규칙’이 하나의 사고방법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때 말의 무게는 산 하나와 같다. 기억해야 할 것은 말이 사고방법이 되는 것이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인간에게는 말이 사고방법일 수 있고 대부분이 이에 포함된다. 누군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면, 어느 정도 그가 보이는 법이다.

  <이갈리아의 딸들>이 제시하는 바인 낯설음을 생각하고 말의 중요성을 기억하는 것은 비단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이는 남성과 여성은 포함한 모든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갈리아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바뀌었다는 것에서 오는 낯설음은 익숙한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낯설음을 통해 익숙하게 여겨졌던 현 사회의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달리 보게 하는 것이다. 언급하였듯, 이러한 시선은 모든 세계에 적용 가능하다. 예컨대 한 사람을 생각할 때, 내가 어떤 시선으로 그를 보는지 생각해본 후 그 시선을 낯설게 해보자. 이후에 그 사람을 볼 때는 낯설게 한 그 시선이 아니라 조금은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말의 중요성을 기억하는 것은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며 조상님도 강조해 오신 유산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이 인간에게 미치는 힘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말하는 대로 생각하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말이 곧 인간의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건을 볼 때 낯설음을 생각하고 말의 중요성을 생각하자는 것이 연극 <이갈리아의 딸들>의 문제의식을 통해 얻어가는 바이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을 포함한 세계전반에서 유의해야 할 점이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인간의 시선, 사건을 보는 관점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를 인식하기만 해도 당연한 것은 사라진다. 한마디로, 이를 기억하는 것은 당연의 세계에 칼을 꽂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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