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을’이니까 참아야지.”

  두 달 째 월급을 받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필자의 친구가 하소연을 했다. 장부정리가 끝나지 않았다는 핑계로 사장이 월급을 미루고 있단다. 필자의 친구는 ‘을’이라는 이유로 ‘갑’의 자리에 앉은 사장에게 항의도 못한 채 밤늦게까지 편의점 계산대를 지키고 있었다.

  갑을관계는 지위가 높은 자와 낮은 자를 지칭하는 관용어다. 계약서상에서 지위를 구분하던 용어가 지금은 사회적인 표현으로 변화했다. 인간관계를 일종의 계약으로 바라본다면 그다지 놀라운 현상도 아니다. 모든 인간관계에는 조건이 따르고, 칼자루를 쥔 사람이 갑의 자리를 차지한다. 정치권에서도, 일상생활에서도 세상은 온통 갑과 을의 관계로 뒤얽혀 있다. 갑과 을에 대해 논하고 있는 필자 역시 거미줄처럼 섬세하고 복잡하게 짜인 갑을관계에서 긴장을 놓지 못한다.

  갑과 을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결국 사회의 시선이다. 사회는 갑 혹은 을이라는 단어로 당신의 상황과 지위를 설명하려 든다. 교수와 학생, 상사와 후배직원, 점주와 점원과 같은 다양한 인간관계는 모두 갑과 을의 기준에 따라 단편적으로 정의 내려진다.

  더 큰 문제는 개인이 그러한 갑을놀이에 장단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은 갑과 을이라는 잣대를 사회적 관계와 자신에게 들이대며 그 속에서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 스스로를 ‘을’이라 말하던 필자의 친구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갑과 을이라는 표현 아래 규정하고 있었다.

  현대인은 끊임없이 갑과 을을 두고 저울질 한다. 자신이 갑이라는 결론을 얻은 개인은 이내 감정적 우월감에 젖게 된다. 이러한 감정적 우월감은 을을 향한 언어적, 정신적 폭력으로 이어진다. 최근 언론에 보도된 대한항공 승무원 폭행사건과 남양유업 대리점주 사건 역시도 갑을관계에서 비롯된 우월감이 주원인이다. 일반적으로 을의 지위에 놓였다고 평가되는 감정노동자의 경우 70%가 상사로부터 폭언을 듣거나 무시를 당했고 9%가 성희롱을 경험했다고 한다. 또 다른 갑이라고 할 수 있는 고객으로부터는 64%가 인격적으로 모독을 당했다. 갑과 을이라는 사회적 잣대가 개인에게는 폭력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갑과 을의 관계는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언뜻 보면 갑이 절대적으로 우세해보이지만 을이 없이는 갑도 없다. 먹이사슬을 벗어난 악어와 악어새처럼 갑과 을은 미묘한 공생관계를 유지한다.

  갑과 을은 그 경계선조차 모호하다. 당신은 지금 어느 위치에 앉아 있는가. 갑인가, 혹은 을인가. 답을 하기 위해 당신의 지위를 되새길 때, 당신은 문득, 스스로가 갑도 을도 아니라는 사실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아르바이트생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을 때, 당신은 ‘을’의 위치에 있겠지만 물건을 사러 가게에 들어선 손님이 되는 순간, 당신은 단숨에 ‘갑’의 자리로 뛰어오른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갑과 을은 엎치락뒤치락 거리며 자리를 바꾼다. 당연히 당신은 갑과 을, 그 무엇도 아니다.

  필자는 당신의 정체성에 물음을 던지고 싶다. 지금도 을이라는 이름의 악어새가 되어 아슬아슬하게 악어 입을 드나들고 있는가. 사회가 요구하는 갑을놀이에 동조하지 않고 과감히 악어새라는 이름표를 떼어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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