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추상미술이 흥할 수 있었던 계기중 하나는 아마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해석의 다양성일 것이다. 정확한 형태가 없는 것과 같이, 관객은 자신이 가진 다양한 이상과 개념 또는 감정들을 작품에 이입시키고 동질화하며 공감을 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이는 몬드리안의 작품에서 따뜻함을, 어떤 이는 차가움을 본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열린 해석의 장은 다시 말해서 어떠한 개념이나 감정도 수용할 수 있다는 위험성 또한 가지고 있다.

  니체의 철학도 마찬가지이다. 각각의 개인들에게 수용된 니체의 철학은 분명 같은 개념임에도 여러 가지의 다른 형상들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 현상은 니체의 철학이 모호하다는 말이 아닌 개인의 특성 혹은 개인 그 자체를 긍정하게 하는 하나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자신의 실재 본성을 거부하는 삶에 대해 니체는 강력하게 규탄한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삶을 보존하기 위한 기교인 것이다.” 오랫동안 인간에게 주입되고 실천된 금욕주의적 이상은 다른 이상을 실현하고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다리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은 항상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실현하기 위해 인간의 가장 일차원적인 욕망, 본성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했다. 회사에서는 화를 내고 싶다고 화를 낼 수도, 당장 슬퍼도 울 수가 없다. 사내 트러블이 효율적인 업무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육체적인 본성을 환영으로 격하시키는 인간의 사고에서 삶의 감정이란 인간이 느끼지 말아야할 최하점의 고통이다. 사람들은 고요한 삶만을 이상적인 것으로 보았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 않고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수도승처럼 어떠한 감정의 교란을 느끼지 않는 무던함의 상태가 바로 금욕주의에서의 이상인 것이다.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해탈의 경지’도 이와 같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삶이 이와 같이 본질을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무언가를 생성해야 하는 것일까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분명 큰 오류가 있다. 흔한 유행드라마에 줄기차게 나오는 “이것은 너 답지 않아.” “그럼 나다운 것이 뭔데!” 라는 대사처럼, 인간은 늘 자신의 본성을 찾고 그것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 현존하는 60억의 인간인구 중에 나만은 독보적이고 자의적이고 싶다는 가장 원초적인 의지인 것이다. 이렇게 ‘나’답고 싶어 하는 인간이 하물며 자신이 가진 가장 일차원적인 감정 일반을 무시하고 부정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이 될 것이다.

  여기서 니체는 금욕주의적 이상을 버리고, 감정과 본성을 억제하는 것에서 벗어나 삶에 대한 의지들을 무한히 추구하기를 야기한다. 자신이 가진 고유의 특성이 하나의 존재방식이 되고, 그것들이 가진 거리감으로부터 가치가 창조된다. 예쁨과 못생김은 분명한 존재방식이지만, 그것은 누가 잘났고 누가 못났다 식의 상하관계가 아닌 주체가 가진 고유한 존재적 특성이며 오히려 그 서로간의 차이가 주체를 더욱 빛나게 한다는 것이다.

  ‘나’와 ‘너’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거리감으로부터 사랑은 시작된다. 무지에서부터 시작해 앎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기원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순간 서로에 대한 선의의 비판과 창조는 계속된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금욕주의적 성직자’의 사랑이 아니라는 점이다. 니체는 개인이 가진 가장 개인다운 특성과, 그것을 가장 잘 발현할 수 있는 순간적인 감정에까지 주목하며 그것을 긍정할 수 있게 하는 가치를 실천하게 한다. 지나친 스펙주의와 자기포장으로 얼룩진 내면의 피로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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