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무고시 최연소 합격자 윤홍선씨 인터뷰

▲ 마지막 외무고시였던 제47회 외무고시의 최연소 합격자 윤홍선씨. 이도은 기자 doniworld@ewhain.net


  회색 스커트에 흰색 재킷, 단정하게 묶은 머리와 목에 걸린 국립외교원 출입증.

  양재역 국립외교원 길 건너 카페에서 만난 윤홍선(정외‧10)씨의 첫인상은 영락없는 5급 공무원의 모습이었다. 윤씨와 두 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이화사랑 김밥을 좋아하고, 교정에서 친구와 수다를 늘어놓는 평범한 여대생이었다.

  윤씨는 2013년 시험으로 막을 내린 제47회 외무고시의 최연소 합격자다. 2010년 본교 입학 후 첫 과 엠티에서 러시아어로 자기소개를 선보인 새내기가 3년 뒤 외무고시 러시아능통자전형 합격자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한국이 어디야? 너희 나라 대통령은 김정일이지?”

  윤씨는 10년 전 한 러시아 초등학교 교실의 지리수업 시간에 외교관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5살 때 회사 주재원인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로 건너가 8년간 그곳에 거주했다. 어린 윤씨는 대한민국을 모르는 그곳 친구들의 실상에 충격을 받았다.

  “지구본에 표시된 한국을 가리켰더니 같은 반 친구들이 북한이라고 하거나 한국을 처음 본다고 했어요. 우리나라가 가장 크고 좋은 나라라고 믿었던 저는 큰 충격을 받았죠. 그때부터 우리나라를 알릴 수 있는 직업인 외교관에 관심이 생겼어요.”

  윤씨는 작년 2학기부터 본격적인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마지막 외무고시라 초조할 법도 했지만, 그는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공부했다.

  “마지막 시험이라는 것에 크게 연연하지는 않았어요. 이번에 떨어져도 외교아카데미(외교관 후보자를 1년간 교육해 교육 성적순으로 외교관을 선발 하는 국가기관) 시험을 계속 볼 생각이었죠.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도전했어요.”

  윤씨는 외무고시를 한 번에 합격했다. 윤씨의 합격 비결은 단순했다. ‘하루 10시간 이상 공부하는 것.’ 이는 윤씨가 공부하며 지킨 원칙이다. 외부와 연락도 철저히 끊었다. 주변 사람의 취업 소식 등을 듣다 보면 마음이 흔들려 공부에 집중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서다.

  “하루 아침에 친구들과의 연락을 끊기란 쉽지 않았어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고시촌으로 갑자기 사라졌죠. 평소 활동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이 방법이 최선이었어요.”

  ‘지금 힘들다면 잘하고 있는 것이다.’ 윤씨는 공부방과 연습장 등 눈에 보이는 곳곳에 이 문구를 적어 뒀다.

  “이 문구가 보일 때마다 뭔가를 성취하려면 힘듦을 이겨야 한다며 스스로 채찍질했고, 과정이 너무 쉬우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라고 되뇌었죠.”

  고시공부를 하던 시절 가장 도움을 준 사람이 누구였느냐는 질문에 윤씨는 눈물을 글썽였다. 당시 기억 한 켠에 항상 ‘엄마’라는 존재가 있었다.

  “공부할 때 예민해져서 저는 고시식당의 밥을 잘 먹지 못했어요. 그때 엄마가 용인 집에서 신림 자취방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집밥을 갖다 주셨죠. 제 끼니를 챙겨주고 ‘오늘도 화이팅’이라는 말 한마디를 해 주려고 매일 아침 왕복 4시간 거리를 왔다갔다 하신 거예요. 그때 만약 옆에 엄마가 없었다면 지금 이 외교원 출입증은 다른 사람에게 가 있겠죠.”

  최연소 합격은 윤씨에게 꼭 행복한 타이틀만은 아니다. 그는 비교적 짧았던 대학 캠퍼스 생활을 그리워했다.

  “미리 사회에 나와 일찍부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점은 장점이죠. 하지만 친구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수업시간에 교수님의 말씀을 정신없이 필기했던 것, 무념무상하게 이화사랑 소파에 앉아있던 것 등 대학생활이 참 그립죠.”

 현재 윤씨는 양재 국립외교원과 정부 과천청사를 오가며 합격자 연수를 받고 있다. 그는 내일 아침 8시까지 용인 집에서 과천 연수원으로 출근해야 해야 한다고 했다. 윤씨는 매일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다고 투정을 부렸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즐거워 보였다. 그의 뒷모습에서 세계의 다리가 되겠다던 반기문 UN 사무총장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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