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에서는 끊임없이 사진들이 업로드 된다. 우리는 그 곳에서 ‘셀카’ 뿐 아니라 유명 커피전문점의 커피잔만 덩그러니 있는 사진, 심지어 상품의 로고만 찍힌 사진 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은 무엇을 표현하고 싶어서 사진을 올리는 것일까? 단지 육하원칙에 따라 자신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를 사진 한 장으로 표현하고 싶어서 일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저자로 잘 알려진 밀란 쿤데라는 그의 또 다른 저서인  『불멸』에서 ‘사진’을 모티프로 다룬다. 소설 속 두 인물은 ‘사진’에 대해 다른 태도를 취하는데 그 중 한 명인 아녜스는 사진 찍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사진기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그녀에게 곤욕이기 때문에 그녀는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자신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자신의 모습이 남편의 시선에 닿지 않기를 바란다. 반면 아녜스의 동생 로라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즐긴다. 그녀는 사진을 찢는 아버지에게 화를 내고 선글라스를 착용하면서 자신의 존재가 다른 사람들에게 부각되기를 바란다.
 
  소설 초반에 등장한 ‘사진’의 모티프는 ‘시선’, ‘선글라스’로 이어지고 그러한 모티프들은 ‘존재’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좁혀진다. 아녜스가 사진을 찢고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등의 행위는 자신의 존재가 자신 외부에 의해 이미지화 되는 것을 차단하려는 노력이다. 이에 비해 로라는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이 준 선물을 볼 때마다 자신을 떠올리기 바라는데 그녀는 그런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끊임없이 확인 받기를 원한다. 쿤데라는 그런 로라의 태도를 “불멸을 향한 몸짓”이라고 표현한다. 즉 그는 “불멸”을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넘어 세속적인 의미로 해석하면서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자신이 각인 되길 바라는 것을 “불멸을 향한 몸짓”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로라처럼 일상생활에서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기억되길 바라는 “불멸”을 꿈꾼다. 그리고 SNS에서 그런 “불멸의 몸짓”들이 등장한다. SNS에 사진들을 올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것은 마치 나의 존재와 존재 가치를 확인 받으려는 불멸의 몸짓과 같다. 그렇다면 SNS에서 불멸을 향한 몸짓은 무엇이 문제가 될 수 있을까? 문제는 나의 바깥에 있는 존재와 내 안에 있는 존재의 위치가 불일치하는 경우이다. 우리는 우리의 외부 세계 즉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행복한 모습들만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또는 상품 로고를 찍어 올림으로써 그 이미지가 나의 존재가치를 표현해주기를 바란다. 내 존재 또는 존재의 가치가 사진이라는 이미지 또는 사진의 이미지 안에 있는 또 다른 이미지로 표현 된다. 그러나 이미지는 나의 일부가 될 수 있지만 나의 존재 전부가 될 수 없다. 자칫 존재를 편집하기에만 급급하게 되면 오롯이 내 존재 그 자체를 마주할 수 없게 된다. 심지어 내가 편집한 이미지처럼 되어야 한다고 강박증을 갖게 되거나 나의 일부 이미지가 내 존재 전체인 것처럼 왜곡하게 된다.

  쿤데라는 “인생에서 견딜 수 없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로 존재’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고통스러운 자아를 나르는 일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소설 속 아녜스처럼 자신의 존재를 바깥 세계에서 찾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자아로 존재’하려는 것은 고통이다. 왜냐하면 나의 자아를 나에게서 따로 떼어놓고 그것을 관조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언제나 편집 된 존재 즉 ‘부분’으로서 밖에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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