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사랑이라는 말보다 더 아름다운 말은 없다. 사랑은 덮어주고 감싸주고 받아주고 도와주고 좋아하고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씀씀이다. 사랑에는 낭만적 감정의 측면도 있지만, 본래 사랑은 세상을 지탱하는 근원적 힘이다. 그래서 유학에서는 세상의 생성변화의 근원인 태극을 인(仁)하다고 보았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했다. 플라톤은 선이 세상의 기원(아르케)이라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존재의 힘이고, 긍정적 변화의 에너지이다. 사랑하라고 하는 명령은 우리 자신을 위한 궁극적 계명이다.

  정의는 칼로 베는 듯한 기분이 드는 말인데, 따지고 나누는 부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만 하고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정의는 사랑만큼이나 근원적인 언어이다. 정의는 몫을 놓고 다투는 문제이고, 권리주장을 통해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몫을 제대로 나누기 위해서는 몫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하고 따져야 한다. 그래서 정의는 사랑보다 훨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측면을 요구한다. 계산하고 따지다 보면 서로 충돌하게 되고, 그래서 때로 정의는 투쟁의 문제로 간다.

  가족이 인간 공동체의 모델이었을 때, 강조되는 덕목은 사랑과 자비였다. 가족은 사랑과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이고, 국가를 그런 가정의 연장으로 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국가가 가정의 연장이 아님을 강조했고, 시민으로서의 인간은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인간보다 더 큰 선을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근대 이후에 서양은 본격적으로 인간관계를 중립적으로 만들었다. 끈끈한 정으로 얽혀 있는 관계보다 서로 떨어진 상태에서 각자를 존중하는 것을 기본적인 인간관계로 삼았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중립지대가 설치된 셈이다. 그러면서 중요시된 것은 사랑보다 정의다. 사랑하면 좋지만, 사회생활의 기본은 정의다. 인권이나 민주주의, 자본주의 윤리와 여성 해방 등도 모두 그런 사고방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정의가 사회생활의 핵심 덕목이 되면서 새로이 등장한 개념이 구조악이다. 구조악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집단이 저지르는 잘못을 가리킨다. 구조악은 관습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의 양심의 망에 걸리지 않는다. 도덕의 상당부분은 관습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교부들이 말한 원죄는 구조악 속에 사는 인간의 죄를 가리킨다. 죄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죄가 원죄이다. 근대 이후 마르크스는 계급적 차원에서 부르주아의 거짓을 고발했고, 여성들은 남성이라는 집단의 죄를 고발했다.

  구조를 바꾸는 정의는 투쟁을 수반하고, 그 투쟁은 제도의 변화로 열매를 맺는다. 제도는 계층과 집단을 대상으로 형성되는데, 결국은 무리지어 기득권을 유지해온 개인들을 겨냥하는 것이다. 헤겔은 집단적 제도의 변화를 통해 인간 정신이 발전한다고 보았다. 개인의 도덕적 결단에 의존하는 것보다, 제도를 통해서 개인에게 법적인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사랑과 정의의 실현을 위해 낫다고 본 것이다.

  사랑은 정의 안에서 정의를 통해 실현된다.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하는 것보다 가난을 만드는 구조를 바꾸는 게 더 큰 사랑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자발적 선의를 제도적 의무로 바꾸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를 놓고 인류는 많은 시행착오와 갈등을 겪고 있다. 개인적 사랑이 결여된 제도적 정의는 자칫 사랑과 정의의 역사에서 개인의 주체성을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면 사회구성원들은 행복해지기 어렵고 사회의 결속력도 약화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갈등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그렇다. 사랑과 정의가 통일되는 곳에 종교적 영성이 있다. 이화인들은 그런 영혼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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