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화예고로 시작한 서울예고는 올해 개교 60주년을 맞았다. 최은별 기자 byeol2728@ewhain.net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본교와 이화여고를 비롯한 이화재단 소속 학교는 부산에 설치된 임시 교사로 피란 갔다. 간이 천막 아래 흙바닥 위에서 공부하던 각박한 시대였기에 문화 활동은 꿈도 꾸지 못했다. 하지만 이화는 전쟁 속에서도 예술과 역사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화는 전쟁 중 국내 최초의 중등예술교육기관인 이화예고를 세웠고, 본교 임시 박물관인 ‘필승각(必勝閣)’을 마련해 문화재를 보호하기도 했다.

  본지는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해 세계 3차 대전이라 불릴 만큼 잔인했던 한국전쟁 속에서 우리나라 예술과 역사를 지키고자 한 이화의 발자취를 살펴봤다.


△전쟁 속에 멈췄던 한국 예술교육의 물꼬를 트다, 이화예고 

  서울예고는 지하철 2호선 이대역에서 우이동 방향으로 향하는 153번 버스를 타고 약 50분 동안 가면 도착한다. 이곳은 지휘자 금난새, 첼리스트 정명화 등을 배출한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고등학교다. 현재 종로구 평창동에 자리한 서울예고는 한국전쟁 중 ‘이화예고’란 이름으로 시작됐다. 이화의 정신에 뿌리를 둔 이 고등학교는 올해로 개교 60주년을 맞았다.

  1950년대 초, 한국전쟁 중의 한반도.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 한국의 예술교육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예술교육을 실시한 교육기관은 본교와 서울대 단 2곳이었다. 이처럼 대학도 예술교육을 엄두조차 못 낸 상황이었기 때문에 중고등학생을 위한 예술교육도 중단됐다.

  열악한 상황에도 이화는 폐허의 땅 위에 예술 인재 양성을 위한 씨앗을 꿋꿋이 뿌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 전문 중등교육기관인 이화예고(현 서울예고)는 본교와 이화여고가 부산에 피란 간 후 교실 삼아 사용하던 부산 영도의 허름한 막사 옆에서 탄생했다. 

  부산 영도(影島) 피란촌 위에 군용 천막을 쳐 마련된 이화예고에 처음 입학한 학생은 많지 않았다. 신문에 신입생 모집 광고를 냈지만, 전쟁 중 1기 입학생은 미술과 4명, 음악과 9명 등 13명뿐이었다.

  당시 천막 아래 식당용 탁자와 간이의자가 학습 시설의 전부였다. 하지만 이화예고 학생들은 전쟁 속에서도 미술전을 여는 등 활발한 예술 창작 활동을 했다. 이들은 더위와 폭우를 막지 못하는 천막 속에서 시루 속 콩나물 같이 삼삼오오 모여 수업을 들었다. 오전에는 국어·영어·수학을, 오후에는 미술과 음악 실기를 배웠다. 이화예고 교사와 학생들은 천막 교실에서 배운 실기를 바탕으로 개교 첫해 인근 경찰서의 마구간을 빌려 미술전을 열기도 했다.

  이화예고가 부산 임시 교사를 벗어나 제대로 된 교육 시설의 모습을 갖춘 건 1953년 7월 종전 후 서울로 복귀하면서부터다. 이들은 정동 이화여고 교실 한 개를 빌려 학교의 구색을 갖췄고, 이때 현재 명칭인 서울예고로 이름을 바꿨다. 지금의 평창동 교사는 1976년부터 사용했다.

  이처럼 전쟁 속에서 개교한 서울예고는 명실상부한 국내 최초의 예고로 우리나라 유명 예술가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서울예고를 졸업한 본교 인사는 MBC 서현진(무용․03년졸) 아나운서, 성기선 교수(관현악과), 플루티스트 이진원(관현악·93년졸)씨 등이 있다.

  성기선 교수는 “서울예고는 운파 임원식 선생님이 외국의 예고를 본 후 우리나라에도 예술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있어야한다는 신념을 갖고 세운 학교”라며 “악기와 장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도 않고 악기를 전공하는 선생님도 많지 않았던 전쟁 시기에 개교해 오늘날의 모습까지 갖춘 것은 대단한 일이고 이 과정에서 이화가 관련돼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전쟁이 앗아간 이화의 문화재, 초심으로 돌아가 문을 연 본교 임시 박물관 ‘필승각’  

  국내 대학 박물관의 효시인 본교 박물관은 약 8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1935년 본관 자리에서 시작된 박물관은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최대 시련을 겪으며 부산 임시 교정과 본관 자리를 옮겨 다닌 끝에 정문 옆에 정착했다. 본교 박물관은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문화재를 정비하며 대학 박물관의 대표주자로 거듭났다.

  본교 박물관에도 한국전쟁의 그림자는 짙게 드리웠다. 일제강점기부터 모은 유물은 전란 때문에 소실됐다. 전란으로 박물관은 전시를 중단하기도 했다.

  이후 박물관은 아픔을 딛고 피난지인 부산에서 문화재를 수집해 1953년 임시교사에서 다시 전시실을 열었다. 바로 이곳이 전쟁 속에서 한국문화를 보존해야 한다는 이화의 사명감이 담긴 부산 ‘필승각’이다. 당시 김활란 총장은 이정애 교수(전 간호학과)와 함께 도자기, 목공품 등 수집품을 다시 정리하고 이를 기증해 필승각에 전시했다. 1952~1953년 피난지에서 모은 수집품은 자수병풍, 포계사 쇠북, 청자매병 등이다. 

  필승각은 한국 전쟁을 겪은 한국인과 외국 장병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곳이 전쟁 중 혼란을 겪던 청년에게 민족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또한, 초토화된 한국을 방문한 유엔군 장병과 외교관에게는 한국이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가진 문화국가임을 알리는 외교의 장이 되기도 했다.

  1953년 서울 수복 후 신촌으로 복귀한 본교 박물관은 곧바로 본관 109호실에 피난시절 수집한 소장품을 전시했다. 이때 박물관은 대학 박물관으로서 위상을 높이기 위해 국보급 명품을 수집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현재 박물관은 국보 107호 조선 백자철화 포도무늬 항아리, 보물 416호 고려 청자투각 돈 등을 소장하고 있다.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의 수난기에도 계속된 본교의 문화재 수집은 오늘날 본교 박물관의 위상을 세우는 기반이 됐다.

  박물관 관계자는 “본교 박물관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흩어진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고 부산 피난지에서 전시를 개최하는 등 한국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아왔다”며 “앞으로도 이러한 노력을 계속해 그간 쌓아온 대학 박물관으로서 명성을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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