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금 홀가분해졌다. […] 바그너에게서 등을 돌린 것은 내게는 하나의 운명이었으며 ; 이후에 무언가를 다시 기꺼워하게 된 것은 하나의 승리였다. 어느 누구도 나보다 더 위험하게 바그너적인 짓거리와 하나가 되어 있지는 않았으리라. 어느 누구도 나보다 더 강력하게 그것에 저항하지는 않았으리라. 어느 누구도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나보다 더 기뻐하지는 않았으리라. […] 내가 도덕주의자라면, 어떤 명칭을 부여하게 될지 알겠는가! 아마도 자기극복이라는 명칭일 것이다.” 니체는 1888년에 쓴 『바그너의 경우』라는 책의 서문을 이렇게 시작한다. 바그너와의 우정이 깨어진지 이미 12년이 흘렀고, 바그너가 사망한지도 5년이 지난 시점에, 그는 바그너와의 분리를 확인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극복”이라 부른다.
 
   두 사람은 1868년 라이프치히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니체는 아직 문헌학을 공부하는 24세의 학생이었다. 음악을 사랑하고 이제 막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철학에 빠져들기 시작했던 이 수줍은 청년이 만난 바그너는 55세의 유명한 작곡가였다. 그는 니체가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와 같은 나이였다. 니체는 그에게 매료되었다. 바그너는 그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었고, 함께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바그너는 니체를 초대했다. 첫 만남 직후에 니체는 스위스 바젤의 교수직을 제안 받았는데, 니체는 바젤에서 그리 멀지 않은 트립센에 사는 바그너와 그의 부인 코지마를 자주 방문할 수 있었다. 그들은 즐겁고 유쾌한 추억들을 나누며 가족과도 같이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코지마 바그너와 팔짱을 끼고 산책을 하며 대화를 나누고, 가벼운 장난을 치며 유쾌한 저녁시간을 보내고, 크리스마스와 생일을 축하하고,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고, 사적인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청년 니체에게 바그너는 숭배의 대상이었다. 반면 바그너는 니체의 능력을 알아차렸고, 그것을 자신의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그너에게 헌정된 니체의 첫 번째 저작 『비극의 탄생』은 이 시기에 쓴 것이다. 그것은 바그너와의 대화에서 출발한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저작이기도 했다. 이 책과 함께 보낸 편지에 니체는 “이 책의 모든 내용에서 당신이 제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해 오로지 감사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라고 썼다. 바그너는 기뻐했다. 1872년 니체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확하게 말한다면 당신은 내 아내를 제외하고는 내 삶이 내게 허락한 유일한 소득입니다”라고 쓴다.

  그러나 그 관계는 머지않아 깨어진다. 독립을 원하는 청년의 정신은 권위와 영향력에 저항한다. 바그너에 대한 그의 애착과 숭배가 강했던 만큼, 그로부터의 분리는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유로운 인격이 되기 위해서, 진정한 비판적 독립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것을 내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1876년 바이로이트에서 니체는 바그너로부터 벗어난다. 균열은 그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지만, 니체는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의 초연될 바이로이트 축제에 참석했다. 그리고 초연 전날 바그너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거대한 환멸을 경험한다. 거짓 이상주의, 속물적인 사교모임, 대중들의 소란, 믿어왔던 모든 것의 배반, 니체는 실망한 나머지 병이 나서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니체는 바그너에게서 벗어난다.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1889년 1월 3일, 니체는 요양을 위해 머물던 토리노의 한 광장에서 마부가 자신의 말에게 채찍질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연민과 동정심에 울면서 말의 목에 매달린다. 그리고 정신 착란. 니체의 정신의 역사는 이 자리에서 끝이 난다. 그 후 10년을 더 살았지만, 더 이상 아무 것도 쓰지 못한다. 토리노에서 보내던 마지막 시간에 니체는 『바그너의 경우』에 이어,『니체 대 바그너』를 집필했다. 왜 그의 마지막 저작들은 ‘바그너’인가? 바그너와 결별한 이후 니체는 자유롭고 창조적이며 비판적인 정신적 산물들을 생산해낸다. 니체는 처음 출발했던 그 자리에 머물지 않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극복해나갔다. 그러나 아마도 그에게 바그너는 마지막까지 남겨진 과제였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 바그너와 그의 음악을 비판하고, 젊은 시절의 자기 자신을 비판한다. “우리들은 대척자이다.” 그것은 젊은 정신이 받아들였던 첫 번째 지적 자극, 그에 대한 매혹, 그 영향과 권위에 대한 저항의 완성이다. “나는 바그너의 음악을 영혼의 디오니소스적 강대함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했다. 바그너 음악에서 나는 태곳적부터 봉쇄당해온 삶의 근원력을 마침내 숨 쉬게 하는 지진 소리를 들었다고 믿었다. […] 사람들은 알 것이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알 것이다. 내가 바그너와 쇼펜하우어에게 무엇을 선물했었는지를 - 나는 나를 선물로 주었던 것이다.” 자기를 바쳤던,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친구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것은 니체에게 자기 부정이자 자기 극복의 길이었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