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내가 이따금씩 노트해 두는 방식으로 은밀히 진행되었던 철학적인 비판은 상대방이 대답을 할 때에만 의미를 갖고 성과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가 둘 다 살아 있는 한 이러한 가능성은 항상 남아 있다. 1933년부터 일어났고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어떤 것이 하이데거와 나 사이에 개방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나는 종결을 맺을 수 없다.” 야스퍼스는 자신의 「철학적 자서전」에서 하이데거와의 역사를 담은 장을 이렇게 맺는다. 이 글은 야스퍼스의 바람대로, 하이데거가 죽은 뒤인 1977년에야 비로소 출간되었다. 살아있음으로써 열려있던 토론의 가능성은 1969년 야스퍼스의 죽음으로 닫혀버렸다. 그렇게 두 철학자의 토론도 종결을 맺지 못했다.

  “우리의 만남은 하이데거에게는 놀라운, 그리고 나에게는 고무적인 사실이었다. (…) 나와 같은 시대의 철학자 중에서 나에게 근본적으로 연관이 되었던 유일한 사람이 하이데거다. 이러한 사실을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 야스퍼스는 하이데거를 1920년 프라이부르크에서 처음 만났다. 이제 막 정신의학과 심리학에서 철학으로 전향하기 시작하던 야스퍼스에게 하이데거는 사심 없이 진지하고 만족스러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철학적 동료이자 친구였다. 당시 야스퍼스는 이미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철학과 교수였다. 그는 7살이나 연하인 하이데거를 자신이 살던 하이델베르크로 초대하곤 했다. 하이데거가 방문하면 두 사람은 공동의 철학적 관심사를 공유하고 토론하면서, 유쾌하고 진지한 우정을 나누었다. 가장 큰 그들의 공동 관심은 “당시 독일 대학에서 나타나는 철학의 형태가 변화되어야 된다는” 문제의식이었다.

  공동 관심사와 유쾌한 대화에도 불구하고, 두 철학자의 사유방식의 차이는 피할 수 없었다. 야스퍼스의 첫 철학적 저작인 「세계관의 심리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촘촘하고 날카로운 비판은, 두 철학자들의 ‘차이’를 확인시켜주었다. 그래도 우정은 지속되었다. 야스퍼스는 하이데거의 비판이 정확하지고 유용하지도 않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하이데거의 개념성을 존중했고 그로부터 많은 것을 얻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거리낌 없는 대화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신중하게 고집을 피우지 않으면서 우리 둘은 상대방을 인정해 주는 데서 인색하지 않았다”고 야스퍼스는 회상한다.

  결정적으로 두 철학자의 행로를 갈라놓은 갈림길은 1933년에 나타났다. 1933년 5월 하이데거는 나치당에 가입했고,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으로 선출되어 나치를 지지하는 연설과 신문 사설을 발표했다. 반면 야스퍼스는 부인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국가의 반동분자로 간주되어 1935년에는 철학부 학과장 자리를 내놓아야 했고, 1937년에는 강의를 빼앗겼으며, 1943년 이후에는 저작활동을 금지 당했다.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야스퍼스와 그의 아내는 전쟁 기간 내내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독일을 떠나지 못했다. 1945년 3월 두 사람이 4월 14일 강제수용소로 끌려갈 것이라는 전갈이 왔다. 그러나 3월 30일 하이델베르크가 미국에 의해 점령되면서, 극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야스퍼스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나치를 옹호한 적은 없지만) 나치 정권과 유연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상황에 따라서는 거짓말도 했다. 전쟁이 끝나자 여러 신문들이 그를 영웅으로 치켜세우려 했다. 야스퍼스는 그릇된 영웅화에 반대하는 글을 신문에 투고했다. “목숨을 지탱한 우리는 죽음을 구하지 않았다. 우리의 유대인 친구들이 줄줄이 끌려갈 때도 우리는 길가에 나가보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들이 우리마저 파멸시킬 때까지도 우리는 소리 한 번 질러보지 못했다. 우리는 그저 목숨을 유지하기에만 급급했다. (…)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이미 우리에겐 커다란 죄책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비참하게 만드는 것인지, 하느님 앞에서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사정은 달라졌다. 1933년부터 34년 사이 하이데거는 나치에 협력했다. 그 후 환멸을 느끼고 분명한 거리를 두었지만, 당적은 45년까지 유지했다. 전후, 나치 청산 위원회는 하이데거에게 유죄판결을 내렸고, 그의 강의는 중단되었다. 그 금지는 1950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하이데거의 이름과 철학에는 나치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하이데거의 철학이 파시즘적이었는지, 그의 사유에 파시즘이 잠복해 있었는지, 그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치에 협력했는지, 논쟁은 계속된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 모든 일에 대한 하이데거의 ‘침묵’이다. 1948년 스위스 바젤로 자리를 옮긴 야스퍼스는 1933년부터 끊겼던 하이데거와의 서신 교환을 재개하려 한다. 야스퍼스는 하이데거로부터 무언가 들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 물음은 대답되지 않았다. 그리고 대화는 다시 침묵으로 빠졌다. 살아있는 한 열려 있던 가능성은, 그렇게 닫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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