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을 품은 사대문, 21세기 서울에 부활하다
한성을 품은 사대문, 21세기 서울에 부활하다
  • 박선영 기자
  • 승인 201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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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은별 기자 byeol2728@ewhain.net

  600년 전 조상은 서울을 뭐라고 불렀을까. 조선 건국 초기만 해도 서울의 명칭은 한양이었다. 조선 건국 직후 태조 이성계(이성계)가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약 17km의 성곽을 쌓기 시작하면서 한양을 ‘한성’으로 바꿔 불렀다. 즉, 오늘날 서울과 달리 한성의 범위는 사대문인 돈의문(서대문), 숙정문(북대문), 숭례문(남대문), 흥인지문(동대문)을 잇는 성곽 안이었다.

  사대문은 500년 세월 동안 한성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했지만, 현재는 주변 성곽과 이어지지 못하고 몸체만 덩그러니 남았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성곽의 상당 부분이 훼손됐고 현대식 도로 정비를 위해 불가피하게 성벽을 허물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허리가 끊긴 채 남아있던 600년 한성의 역사가 다시 살아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서울시는 2009년 사대문 중 유일하게 터만 남았던 서대문 복원 계획을 발표했다. 5년 전 방화로 소실됐던 국보 1호 남대문도 이달 초 복원됐다.

  이에 본지는 14일 본교에서 출발해 서대문 터-남대문-동대문-북대문을 잇는 끊어진 성곽 사이를 따라 600년 전 한성을 걸었다. 4대문과 근처 곳곳에 남아 있는 이화의 흔적도 함께 찾았다.  


△본교 터에서 한성으로 가기 위한 가장 가까운 문, 서대문을 통하라  

▲ 정동 사거리에 위치한 서대문 터 최은별 기자 byeol2728@ewhain.net

  본교와 연세대가 자리한 안산(安山) 밑자락은 600년 전에는 한성 밖이었다. 무학대사가 안산을 ‘천하대명당’으로 손꼽으며 이성계에게 궁터로 건의하기도 했지만 경복궁 자리로 궁터가 정해지며 본교 자리는 한성 밖으로 밀려났다. 당시 사람들이 한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대문 중 현재 본교와 가장 가까이 위치한 문이 서대문이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서대문에 가기 위해 걸었던 서소문로를 따라 서대문 터에 도착했다. 이대역에서 아현역 방향으로 273번 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가면 강북삼성병원과 경향신문사 등 고층 건물이 밀집한 정동 사거리가 나온다. 100년 전 이곳엔 서쪽의 가장 큰 문인 서대문이 있었다.

  현재 이 자리엔 ‘돈의문 터 1422~1915’라는 글귀가 새겨진 안내 벽만이 세워져 있다. 서대문은 태조 이성계 때 한성을 감싸는 성곽을 만들며 함께 건립됐지만 1915년 조선총독부의 전차 궤도 복선화사업을 이유로 철거된 후로 터만 방치됐다. 2m 높이인 안내 벽은 바로 앞에 있는 강북삼성병원의 부설물로 오인하기 쉽다. 나무로 된 벽 앞에는 차도가 나 있어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한 발견도 쉽지 않다.

  서울시는 서대문이 사라진 지 100년 가까이 지난 2009년에 서대문 복원 사업에 착수했다. 서울시는 서대문사사거리 고가도로 등 주변 고가차도도 서대문 원형을 완벽하게 복원하기 위해 철거하기로 했다. 당초 완공 계획은 올해였지만 기자가 14일 찾은 서대문은 아직 공사에 착수하지 않은 상태였다. 서울시의 계획대로 서대문이 복원되면 2020년 경 비로소 사대문이 갖춰진 한성이 재탄생한다.

  현재 서대문 터 옆에는 이화여고가 있다. 이화여고 자리는 1922년 본교가 신촌으로 캠퍼스를 옮기기 전에 이화학당이 있던 자리다.

  이화외고를 졸업한 이유지(영문․09)씨는 “숭례문 복원이 이뤄진 만큼 서대문 복원 사업도 빠른 시일에 마쳐 서울의 역사적 이미지를 살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화의 교육 정신 진선미를 담은 남대문, 5월 한성에 다시 태어나다

▲ 복구를 마치고 4일 공개된 남대문 최은별 기자 byeol2728@ewhain.net

  이화여고와 예원학교 사이에 난 길을 따라 약 20분 걸으면 남대문이 나온다. 남대문은 5년 전 방화 사고로 소실된 후 새 옷을 입은 우리나라 국보 1호다. 14일 정오. 평일 오전에도 남대문은 시민과 외국인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남대문 복원 사업은 변영섭(사학․71년졸) 문화재청장이 주도해 4일 완공했다. 변 청장은 남대문 복구를 마쳤다는 것을 선대왕께 고하는 ‘고유제’에서 초헌관(조상에게 술잔을 올리는 직책)으로 직접 작헌례(술을 올리는 예)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 단장한 남대문에서 느껴지는 세월의 묵직함은 전보다 덜 했다. 화재 당시 누각을 받치는 석축만 남긴 채 모두 불타 성곽의 대부분을 새 석재로 쌓아올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성문 주변 부분에 옛돌과 새돌을 교차시켜 쌓아올린 부분에서 이전 남대문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다.

  인파가 가장 몰린 곳은 남대문 입구인 홍예문이었다. 홍예문 천장에 그려진 용 그림을 보기 위해서다. 홍예문 천장에 그려진 용 그림은 복원 과정에서 원판과 모양이 다르다는 이유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날 남대문에 방문한 양아름(부산시 연제구․22)씨는 “5년 전 남대문이 불타는 모습을 생방송으로 보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며 “새로 지은 남대문에서 이전의 무게를 느끼긴 힘들었지만 세월이 가며 지금의 남대문도 후손에게 의미 있는 역사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본교 교표에 등장하는 진․선․미가 새겨진 성문이 바로 남대문이다. 교표에 그려진 남대문은 우리 민족을 대표한다. 교표의 진·선·미를 이고 있는 열린 대문과 그 사이로 난 좁은 길은 진·선·미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을 상징한다.


△보구여관을 헐고 동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끊어진 역사를 잇다

▲ 동대문 왼쪽에 자리한 성곽공원과 동대문 교회 최은별 기자 byeol2728@ewhain.net

  남대문 뒤편 남대문시장(회현)역에서 지하철 4호선을 타고 당고개 방면으로 네 정거장을 이동하면 동대문역에 도착한다. 14일 오후 4시. 우리나라 보물 1호 흥인지문은 한창 공사 중이었다. 오랜 세월을 이기지 못해 훼손된 성벽 뒤쪽을 보수하기 위한 공사다.

  공사 먼지에 뒤덮인 동대문 왼쪽으로는 언덕을 따라 성곽이 끝없이 펼쳐졌다. 또한, 푸른 잔디 위 색색의 봄꽃이 만개한 언덕에 ‘동대문 성곽공원’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적혀 있다.

  서울시는 2010년 동대문 성곽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 자리에 있던 보구여관을 헐고 성곽 공원을 조성했다. 보구여관은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으로 한국 여성 의료사업의 길을 연 본교 부속병원이다. 1987년~2010년까지 이곳을 지키던 보구여관은 원래 주인이었던 동대문 성곽에 다시 자리를 돌려주게 됐다.

  동대문 성곽공원 입구에 들어서면 페인트가 바랜 낡은 교회를 볼 수 있다. 바로 본교 설립자인 메리 스크랜튼(Mary Scranton) 여사의 아들인 윌리엄 스크랜튼(William Scranton)이 세운 동대문교회다. 1891년 본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동대문부인진료소의 기도처로 시작된 동대문 교회는 여학교를 운영하며 여성 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교회를 낀 언덕을 지나가면 끊임없이 성곽이 이어진 곳곳에 정자와 쉼터가 있어 성곽 아래로 보이는 마을을 구경하며 쉴 수도 있다. 동대문 성곽 공원 구역인 동대문 성곽은 서울에 남아 있는 성곽 중 그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진성(서울시 동대문구․21)씨는 “동대문 성곽이 다른 곳보다 잘 보존돼 동대문구 주민으로서 자랑스럽다”면서 “사대문이 서울의 상징인 만큼 서울시가 적극적으로 복원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곽을 따라 걷다보면 ‘이화텃밭’, ‘이화슈퍼마켓’, ‘이화이발소’, ‘이화정육점’ 등 ‘이화’라는 낯익은 단어를 주변 건물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골목 사이사이로 난 계단과 주택에 벽화가 그려져 있는 이곳은 ‘이화동 벽화마을’이다. ‘이화동’이란 명칭은 마을의 정자가 봄이면 배꽃으로 둘러싸여 이화정(梨花亭)이라 불린 데서 유래됐다.

  동대문에서 시작된 성곽은 동쪽의 작은 문(동소문)인 ‘혜화문’으로 이어지고 혜화문은 북쪽의 가장 큰 문인 숙정문(북대문)을 잇는다. 숙정문은 나머지 3대문과는 달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 기능은 하지 않았다. 조선 시대 숙정문은 4대문 중 가장 존재감이 없는 대문이었지만 현재 이곳에 청와대가 들어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