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당시로서는 장수에 속하는 84세에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께서는 항상 웃으셨다. 곁에서 아무리 버릇없고 싫은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허허허… 참 잘한다, 좋~~다”고 말하시며 웃으셨다. 그리고 손자들에게는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유난히 긍정적인 생각으로 똘똘 뭉쳐 세상을 사셨다.

  나는 할아버지 영향을 받았는지 모든 인생역정에서 항상 긍정적이고 즐겁고 보람되고 유익한 길만을 찾아가려고 한다. 남들처럼 체격이 우람하지 못하지만 강인해서 좋고, 단순기억력은 빵점이지만 이해력은 괜찮으니 상관없고, 문학적 예술적 감각은 없지만 과학적 사고력은 쓸 만하니 그럭저럭 세상 살아가는 데 큰 불편은 없다. 그뿐이랴. 팔 힘이 너무 약하다 보니 골프채를 제대로 휘두르기 힘들어 몇 년 연습만 하다가 젊었을 때 집어치웠다. 대신 튼튼한 다리만 있으면 충분한 스키를 탄다. 운동신경이 별로라서 야구나 테니스 같은 운동은 잘 못하지만 등산을 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20세기 위대한 물리학인 양자역학, 통계역학이 세상에 등장하자마자 작은 별이 진화의 마지막 단계에서 지구 정도의 크기로 줄어들어 백색왜성이 되는 것에 적용하여 일약 유명해진 인도 출신 찬드라세카(Chandrasekhar)는 1983년 시카고대학 교수로서 노벨상을 수상하였고, 1995년 84세의 나이로 서거할 때까지 58년 동안 교수로 재직하면서 연구 동료가 언제나 30세 근처라는 점에 무척 행복해했다고 한다. 십 년을 주기로 별 구조로부터 블랙홀, 중력파까지 천문학의 새로운 분야를 두루 개척하면서, 매번 몇 편의 중요 논문을 발표하고 교과서를 편찬하곤 했다. 또 그는 20년간 천체물리학 최고의 잡지인 Astrophysical Journal 편집인이었다. 약관 21세에 캠브리지대학원에 장학금을 받고 몇 달이 소요되는 인도에서 영국으로의 항해 동안 백색왜성 논문을 작성했다고 한다.

  그는 언제 보아도 항상 똑 같은 흰 와이셔츠와 검정 양복을 입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연구실을 지켰다. 시카고에서 140km 떨어진 위스콘신 주에 있는 당시 세계 최대의 굴절망원경이 있는 여키스 천문대에 거의 매일 강의를 하러 다녔는데 왕복 운전에 족히 6시간은 소요되었을 것이다. 젊은 교수들이 그 같은 상황에서 연구를 할 여력이나 있는 지 궁금해 하면, 그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했다고 한다. 즉, 자동차 운전대에 앉으면서부터 연구실에서 생각해오던 문제를 계속 머릿속에서 풀어나가다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즉시 결과를 원고지에 옮겨 적으면 되므로 시간낭비도 없고 특별히 힘들 일도 없다고 했다 한다. 학사지도교수였던 그 분께 37년 전 수강신청 사인을 받으러 다녔던 때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분은 항상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엄격한 생활을 하는 분이었다. 장담하건데 그는 자기가 하는 일에 최고의 자부심을 가지고 누구보다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던 행복한 분이었다. 일상적인 자를 가지고 획일화된 사고로 세상을 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셨다.

  지금까지 두 차례 남극에서 66일을 체류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경험이 되었겠지만 좀 심심하고 춥고 따분하지 않았냐고 물어보곤 한다. 나는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항상 즐겁고 새로운 기분으로 뜻 깊은 시간을 보냈다. 모든 것이 새롭고, 거기 아니면 어디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할 독특한 환경인데 어디 심심할 틈이 있었겠는가? 심심하면 읽으러 가져갔던 책들은 거의 펴볼 기회도 갖지 못한 채 귀국해야 했다. 주어진 환경을 요리하는 것은 사람마다 매우 다르다. 어떤 젊은이들은 본업을 팽개쳐두고 단순 일용 노무자로 임시 채용되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오기도 하였다.

  외국으로 출장을 갈 때면 나는 항상 비행기날개가 보이지 않는 창가를 달라고 한다. 지상 10km 위에서 내려다보는 지구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환상적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거의 모든 승객이 전혀 밖을 내다보지 않는 다는 것이다. 관광지에 가면 기껏 3만200m 정도에 불과한 전망대에 비싼 입장료를 내고 줄 서서 힘들게 올라가 주변 경치를 구경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비행기를 타고 밖을 내다보면 전망대보다 몇 십 배 이상 높은 곳에서 몇 천 배 이상 넓은 산, 바다, 강, 도시, 농촌 등을 감상할 수 있는데,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알래스카, 시베리아, 그랜드캐넌, 알프스, 히말라야, 로키 산맥, 만리장성, 산호초, 남극대륙, 빙하, 빙산 등 숨 멎을 듯 황홀했던 경치가 생각난다.

  매일 일어나는 일들 – 지하철에서, 강의실에서, 길을 걸으며, 책 읽으며, 글 쓰며, 전자 우편 주고받으며, 전화하며, 인터넷하며, 젊은 학생들과 세미나하며, 음악 들으며, 테니스 치며 – 속에 너무나 많은 행복이 있다. 137억 년 우주의 역사 속에 내가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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