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의 오월을 기억하며 술잔을 기울이다
이화의 오월을 기억하며 술잔을 기울이다
  • 박선영 기자
  • 승인 2013.05.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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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의 달을 맞아 한 자리에 모인 이화의 운동가들 이야기
▲ 9일 이화민주동우회(이민동)의 최은미씨, 배외숙 총무, 송순우씨, 김현자씨, 민주통합당 이미경 의원, 한국여성노동자협회 정문자 대표 , 이민동 황주영 회장(왼쪽부터)이 한자리에 모여 민주화의 계절을 회상하고 있다. 이도은 기자 doniworld@ewhain.net

  “그 시절 우리의 청춘을 두고 감히 낭만이란 단어를 쓰지는 못하지. 가장 꽃다운 나이에 학생 운동의 증거가 될까봐 사진도 안 찍고 일기도 못 썼거든.”

  5월9일 마포구의 한 전통 주점. 5월만 되면 가슴이 설렌다는 중년의 여인들은 잔을 기울이며 회상에 잠겼다. 본교 재학 시절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이화민주동우회(이민동)의 황주영(시각교육․81졸) 회장, 배외숙(정외․89졸) 총무를 중심으로 김현자(법학․91졸)씨, 최은미(법학․91졸)씨, 송순우(법학․91졸)씨가 한 자리에 모였다. 약 1시간 후 민주통합당 이미경(영문·73년졸) 의원, 한국여성노동자협회 정문자(국문․83졸) 대표도 동석했다.

  한 자리에 모인 이들은 최대 15살 나이차가 난다. 때문에 학교를 다닌 시기에 따라 각자 다른 민주화 운동을 겪었다. 황 회장, 이 의원, 정 회장은 1970년~1980년 ‘서울의 봄’, 배 총무는 1984년 대학가에서 합동 시위하던 시절, 법학과 87학번 동기인 김씨, 송씨, 최씨는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실현된 1987년을 대변하는 역사의 산 증인이다. 이들은 각자가 학생 운동했던 시기를 비교하며 우리나라 민주화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경찰과 같이 학교 다닌다고 남녀 공학이래요” 어둠의 1970년대, ‘서울의 봄’을 통해 해방감을 맛보다

  “마이크에 대고 구호만 외쳐도 경찰에 끌려가던 시기였어요. 우리 학교 학생이 모이는 데는 항상 경찰이 있었으니까요. 경찰이랑 학교 다닌다고 이대가 남녀공학이란 우스갯소리도 나왔죠.”

  긴급조치가 내려진 암흑기 속에서 1980년 5월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서울의 봄은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사건 이후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 전까지의 정치적 과도기다.

  당시 대학생은 유신체제에서 벗어난 민주사회를 건설을 꿈꿨다. 본교생 약 4천명은 민주화를 요구하며 정문에서 서소문로를 따라 서울역까지 걸어간 후 종로1가 버스정류장에 최종 결집했다.

 “서울역에서 종로까지 학생으로 가득 찼었지. 서울의 모든 대학생이 도심에 모여 민주화를 요구했던 시위는 처음이었고. 얼마나 짜릿했겠어?”(황주영)

  1980년 5월 17일 저녁. 생활환경관 학생식당에서는 서울시내 대학의 총학생회장이 모여 민주 정부를 탄생시키기 위한 회의를 했다. 이때는 신군부인 전두환 전 대통령이 주축으로 꾸린 임시 기관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해체가 확정돼 학생 시위를 자진 해산한 후였다. 하지만 국보위 해체 이후 국보위를 구성하던 신군부 세력이 그대로 유지된 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다.

  “학생식당에서 회의하고 있는데 자정에 갑자기 계엄령이 발동된 거야. 학교에 전경이 들이닥쳤고 대강당서부터 다 같이 ‘아침이슬’을 부르면서 학교 밖으로 쫓겨났어. 국보위 해체 후 12․12 사태를 통해 신군부 정부가 만들어질 줄이야.”(정문자)

  “우리가 참 순진했지. 단순히 국보위 해체만 하면 민주정권이 들어설 거라 생각했으니까.   서울 학생 시위가 해산된 소식이 광주에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는지 광주는 여전히 시위 중이었어. 18일 광주에서 일어난 참사에 대해선 두고두고 미안해.”(황주영)


△“신촌로터리는 우리의 아지트” 80년대 초 서강대․연세대 등 인근 학교와 합동 시위하다

  “1983년 이후 학교에서 경찰이 빠져나가며 학생 운동 분위기가 한결 쉬워졌지. 그 이후 이야기는 자기(배외숙)가 이어. 자네 84학번이잖아”(정문자)

  배 총무는 전두환 정부에 대항해 대학가의 합동 시위가 절정에 달했던 1984년에 본교에 입학했다. 1960년대 서울 시내 대학은 인근 대학끼리 연합해 지구 단위로 움직였다. 서부 지구에 속한 본교는 서강대, 연세대와 함께 신촌로터리에서 ‘사회와 학원의 민주화’를 외치며 합동 시위를 했다.

  “신촌로터리는 우리의 아지트였어요. 모래내 시장도 주무대였죠. 당시 사회학과 친구들이 주축이 돼 우리 학교 시위대를 이끌었습니다.”(배외숙)

  대학가의 합동 시위는 때로 거침없이 이뤄졌다. 신촌 대학가에서 시위를 하던 학생 약 200명은 경찰의 제지를 피해 서대문구 가좌역 부근에 재집결했다. 돌을 던지고 해산하며 파출소 출입문의 유리창이 깨지기도 했고 잘못 던져진 화염병에 맞아 화상을 입은 학생도 있었다.

  “제가 만든 화염병에서 기름이 새는 바람에 그 화염병을 들었던 친구가 양 팔에 큰 화상을 입었어요. 아직도 친구의 상처만 보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배외숙)
 

△“이화광장서부터 교문 앞 철로까지 전경과의 사투” 1987년 마침내 국민에 의한 정부를 이루다

  “우리 때는 선언문은 읽을 새도 없이 잡혀가던 때지. 좀 더 용기 내 후배들이 시위할 기회를 넓혀줬다면 좋았을 텐데.”(황주영)

  “아니에요. 선배들이 고생하며 민주화의 길을 닦아놓았기에 저희 땐 몸이 덜 고통스러웠죠.”(최은미)

  김현자씨, 최은미씨, 송순우씨는 1987년 본교 법학과에 동기로 입학했다. 이들이 대학에 입학했을 때 학생 민주화 운동은 노동자와 농민의 참여를 이끌어낼 정도로 조직적인 역량을 갖췄다.

  “대학을 왔는데 내가 고등학교 때 알았던 세상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 펼쳐져 있었어요. 시대가 내게 중요한 역할을 요구했죠. 그래서 1학년 때부터 학생 운동에 참여했습니다.”(김현자)

  “우리 때는 대강당 계단서부터 지금 ECC 자리 앞 부분까지 이화광장이 있었어요. 이화광장을 꽉 매운 학생들이 정문 앞 철길로 화염병을 던져가며 전경과 싸웠습니다.”(송순우)

  본교 교수단의 시국 선언도 이어졌다. 장필화 교수(여성학과)를 포함한 17명은 1987년 5월19일 ‘현시국에 관한 우리의 성명’이란 시국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전두환 정부가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담은 직선제 개헌 논의를 중단시킨 4‧13조치를 비난하며 민주개헌을 촉구했다. 

  “장필화 교수님을 비롯해 우리 학교 교수님들은 민주화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소신을 밝혀오셨어요. 2009년에도 시국선언을 하셨지요.”(정문자)

  1987년 학생 운동과 교수의 시국 선언을 통해 마침내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가 6‧29선언을 통해 이뤄졌다. 이민동은 1960~1980년대 이러한 노력으로 얻어진 민주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같은해 12월12일 창립됐다.

  이미경 의원은 “이민동은 민주화 운동 시절 이화의 시대 정신을 계승해 왔다”며 “이화의 후배도 나만 잘 되려 하기보다 시대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