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한테 정말 그때 상황을 더 자세히 묘사할 수 없어요. 어쨌거나 그때 상황에서 나는 벤야민이 아도르노와 내게 쓴 편지를 읽은 뒤에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그 편지에는 다섯줄 정도 씌어 있었어요. 자기가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것,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내가 그에게 자기에 관한 얘기를 전해주도록 할 것이고 자기 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전해줄 거라는 내용이었어요.” 발터 벤야민은 1940년 9월 26일에서 27일 사이,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 지역인 포르 부의 한 호텔에서 사망했다. 의사는 뇌졸중으로 진단했지만, 그는 그 전날 밤 지니고 있던 치사량의 모르핀을 삼켰다. 그와 동행하던 그를란트 부인의 편지는 벤야민의 죽음의 경위를 그렇게 전했다.

  벤야민은 나치에 의해 점령당한 파리에서 탈출하여 미국으로 건너올 수 있도록 그에게 비자를 마련해준 아도르노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겼다. 없애버리지 않을 수 없었던 그 편지, 유서로 쓰였을 그 편지에서, 벤야민은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적었다.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 고향인 베를린을 떠나 파리에 정착했던 유대인 철학자 벤야민은 프랑스를 떠나지 않고 싶었다. 파리에서 느끼는 편안함, 그에 비해 영국과 미국에 대한 낯섦, 그리고 새로운 여정에 대한 감정적인 주저로 인해 미국이나 영국으로 떠날 수 있는 여러 차례의 기회들은 이미 좌절되었다. 마지막 기회라고 보였던,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던 스페인을 통한 탈출도 출구를 열어주지 못했다. 

  아도르노는 1928년 벤야민의 『독일 비애극의 원천』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이래로 그의 죽음과 그 이후까지 벤야민에 대한 이해와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다. 그들이 서로 완전히 동의할 수 없는 의견과 생각의 차이를 드러내는 순간까지도, 그 지지와 존경은 사라지지 않았다. 1934년 이래로 망명자 벤야민의 경제적 어려움을 부분적으로나마 해결해준 것은, 아도르노가 그 멤버로 있던 <사회조사연구소>였다. 1923년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설립된 <사회조사연구소>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창조적인 분파”였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산실이었다. 유대인 학자들로 구성된 <사회조사연구소>는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 독일을 탈출한 최초의 지식인 집단 가운데 하나였고, 제네바를 거쳐 뉴욕으로 옮겨갔다. 아도르노의 주선으로 벤야민은 이 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사회 연구지』에 글을 실으면서, 생계의 유일한 원천이 되었던 최소한의 연구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 연구소와 벤야민의 관계는 생각이나 이념을 공유하는 것도 아니었고, 반발과 갈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벤야민의 글은 『사회 연구지』에 실리기 위해 번번이 수정되어야했다. 그러나 벤야민이 극한의 조건에서 그나마 글을 쓰며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지원되던 최저 수준의 생계비 덕분이었다.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과 같은 벤야민의 글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과 자신의 다른 의견을 감추지 않았지만, 아도르노는 그렇게 하는 동안에도, 벤야민의 사유와 철학하는 방식을 존경하고 존중했다. 특히 미완으로 남은 벤야민의 마지막 작업인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벤야민의 죽음에 대한 전언은 아도르노에게 깊은 충격과 상처를 남겼고, 1955년 발표한 『프리즘: 문화비판과 사회』에 실린 「벤야민의 초상」은 그 쓰라린 상실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아도르노가 그리는 벤야민의 초상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닫힌 문틈으로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빛을 보는 아이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불빛은 이성의 빛으로서 진리의 무기력한 잔영이 아니라 진리 자체를 약속하는 것이다. 벤야민의 사유는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풍요의 선물이었다.”

  『프리즘』을 발표하던 해, 아도르노는 벤야민의 글을 모아 세상에 내놓았다. 훗날 이 선집은 비 마르크스주의적 편향성을 드러낸 것이라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틴 제이는 아도르노를 비방하는 사람들조차도 그가 벤야민을 부당한 망각으로부터 구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전쟁이 발발하고 1940년 초에 쓴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의 9번째 테제는 클레의 그림 「새로운 천사」에 대한 단상으로 시작한다. 파국, 하늘 높이 쌓여가는 잔해, “천사는 머물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등 돌리고 있는 미래 쪽으로 천사를 떠미는 그 폭풍이 바로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이라고 벤야민은 적는다. 아도르노는 벤야민을 이렇게 이해한다. “만일 그가 어떤 형이상학을 쓰게 되었다면, 무한한 희망이 있으나 우리를 위한 희망만은 없다는 카프카의 말이 그 형이상학의 구호로 쓰일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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