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오빠부대 같은 건 댈 것이 아냐. (팬레터가) 다 혈서야.”

  영화도 TV도 없던 시절, 여성국극(배우가 여성으로만 구성된 창극의 한 종류)의 스타급 배우가 1950년대 누렸던 폭발적인 인기에 관한 증언이다. 초기 여성국극을 정립한 임춘앵 명창이 입었던 폭 넓은 바지는 전국적으로 유행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는 극단을 쫓아 가출하는 팬은 예사였다. 가장 인기 있던 배우는 납치를 당하거나 가짜 결혼식을 해달라는 팬의 성화에 시달리기도 했다.

  1950년대 공전의 인기를 누리던 여성국극은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서 급속하게 쇠퇴했다. 올해 개봉한 영화 ‘왕자가 된 소녀들’은 반세기 전 시작된 여성국극의 명맥을 유지하는 이들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1950년대 최고의 대중 인기문화였던 여성국극

  여성국극은 6.25 전쟁 후 한국에서 후퇴한 경제상황과 여성 인권 가운데서도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창․무용․연극을 포함한 종합 공연이다. 최고의 판소리 명창이 뛰어들었고 무대연출가, 안무가도 모두 최고로 꼽히는 사람이었다. 임춘앵, 김경수, 이옥천 등 남성역 배우의 걸출한 칼싸움 연기와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반해 목숨을 건 팬이 쫓아다녔다.

  현재 여성국극은 역사의 주류에서 멀어져 있다. 유신 시대 ‘문예중흥 5개년 계획’이 시작돼 약 9억원을 들여 국립창극단, 무용단 등을 설립할 때 여성국극은 정부 지원에서 배제됐기 때문이다. 조영숙 명창은 “현대 국악계 유명인사라면 한번쯤 여성국극단을 거쳐 갔지만 지금은 아무도 여성국극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성국극의 명맥은 국극을 즐기는 사람들로 이어지고 있다. 무형문화재 제32호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 이옥천 명창 등 70~80대 노령의 거장 배우가 여성국극을 유지하기 위해 경로잔치 무대에 오른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충성을 유지하는 ‘팬덤’도 있다. 박미숙 명창은 현재도 5개의 팬클럽을 갖고 있다.

  점차 팬이 극을 직접 만드는 등 둘 사이의 거리가 좁아지기도 했다. 방송인 이정섭씨는 소년 시절 김진진 배우의 팬으로 출발해 1998년 국극 ‘진진의 사랑’을 직접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사단법인 옥당국악국극보존회를 만들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공연을 유지하고 있다.

  6월5일(수)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조영숙 명창의 팔순잔치를 대신하는 국극 갈라 공연이 예정돼 있다. 8월에는 사단법인 한국여성국극예술협회 정기공연 ‘사도세자’ 공연이 열릴 예정이다.


△하고 싶은 일을 했기에 당당한 ‘왕자가 된 소녀들’

  여성국극을 약 5년에 걸쳐 영상으로 기록한 ‘왕자가 된 소녀들’은 여성국극의 가치를 재평가하면서 여성 예술가의 삶과 퍼포먼스를 기록한 다큐멘터리영화다. 영화는 드물게 여성국극을 포괄적으로 다룬 영상자료다.

  영화는 내레이션이나 자막을 삽입하지 않고 현재 여성국극의 현실을 화면에 그대로 담았다. 영화 시작과 끝 부분에 작년 작고한 조금앵 명창이 남자로 노련하게 분장하는 모습을 담은 부분은 여성국극에서 성 역할 역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느리지만 완벽하게 분장을 완성하는 모습에서 숙련된 거장의 손길이 느껴지기도 한다.

  한편, ‘왕자가 된 소녀들’은 신인 인재가 부족한 여성국극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도 배우나 관객이 여전히 여성국극을 유쾌하고 즐겁게 향유하고 있는 모습을 드러냈다. 김 감독은 “초기에는 여성국극인이 현 실태에 대해 ‘한’을 품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며 “‘남자로 태어나고 싶었지 않는가’하는 질문 자체를 의아해하는 이옥천 명창을 보며 착각임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영화는 4월18일 인디스페이스에서 개봉해 5월까지 아리랑시네 미디어센터, 인디플러스 등에서 상영 중이다. 작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서울 LGBT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된 버전에서 일부 수정, 보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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