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필자가 한 SNS(Social Networking Service)의 타임라인을 읽어 내려가던 중 한 가지 봇(로봇의 줄임말로 이용자가 가상의 인물이나 대상인 것처럼 가장해 운영하는 계정을 일컫는 용어)이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워털루 전투가 9시간30분 만에 끝났다는 것, 새우의 심장이 머리에 있다는 것, 여자가 남자보다 눈을 두 배 더 자주 깜빡인다는 것, 찰리 채플린이 1977년 크리스마스 날에 사망했다는 것. 이들은 상식 봇이 제공하는 ‘상식’이다. 과연 이것들을 상식이라 할 수 있을까.

  상식은 사전적으로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을 의미한다. 상식의 사전적 정의에서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첫째,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이라면 상식이란 따로 배우지 않아도 아는 것인가. 아니다. 상식을 다루는 수 만권의 책이 존재하는 걸 보면 그렇지 않다. 둘째, 정의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상식의 기준이 되는 ‘보통’의 범주에 대해 모두 동의한 것인가. 이 또한 아니다. 역사학자 소피아 로젠펠드(Sophia Rosenfeld)가 쓴「상식의 역사」에 따르면 상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모든 사람의 동의를 얻었던 경우는 그 당대에조차 없었다. 즉, 상식은 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배움에 기인하는 것임에도 보통이라는 이름으로 절대적인 우위를 갖고 있다.

  상식이 갖는 절대적 우위는 상식이라는 말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상식을 어떤 것이 상식에 맞는다고 칭찬하는 데 쓰기보다 상식에 어긋난다, 상식이 없다, 몰상식적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등 비판하고자 할 때 사용한다. 상식 자체가 지닌 절대성이 비판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상식 수준에서 하는 비판은 때론 상대방의 이성과 감성 모두를 향한 화살이 되기도 한다. 상식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간 역사 곳곳에서 진리 혹은 이데올로기 그 이상의 성격을 띠기도 했다.  

  상식이 처음부터 이토록 강력한 절대성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다. 상식의 역사는 기원전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타고나는 5가지 감각(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이 있고, 그 감각들의 교차점에 일종의 ‘공통적인 감각’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상식의 기원이라 볼 수 있는 이 공통감각은 5가지 감각이 받아들인 인상들을 서로 비교하고 통합해 별도로 감각의 대상물에 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과학적 전문용어였던 상식은 17세기 영국 보수주의 철학자와 18세기 「상식」의 저자 토마스 페인(Thomas Paine) 등 급진 사상가들에 의해 기존 가치를 지키기 위해 혹은 기존 질서를 뒤집기 위해 사용됐다.

   17세기, 18세기와 마찬가지로 현대 사회에서도 상식은 사용자들의 목적에 알맞게 재단되고 있다. 상식이 갖는 절대적인 비판성을 단순히 상식이라는 명목으로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봐야 한다. 서로 다른 배경에서 배우며 자란 A와 B에게 C는 상식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식은 사용자의 편의에 따라 ‘보통’의 범주를 형성하여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그 범주에 속한 상식적인 사람과 그렇지 못한 비상식인 사람으로 나누고 있다.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칼이 어떤 것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우리가 그 칼자루를 쥐고 있진 않은지 성찰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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