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아는 지인에게 전화를 받았다. 자신이 모시는 시어머니가 거동이 불편한데다 우울증까지 앓고 계신데 함께 사시는 시아버님이 시어머니를 시설에서 모시자고 한다는 것이었다. 수년째 낮과 밤으로 시어머니의 돌봄을 수행해 오셨던 시아버님이 너무 힘들어서 이제는 더 이상 돌봐드리기가 힘들다고 하신단다. 당장 시어머님을 시설에 보내자니 장기요양등급이 3등급이라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참고로 장기요양등급은 노인의 신체기능수준을 중심으로 결정되는데 1, 2등급이 되어야 요양시설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시어머님을 시설에서 모신다 해도 시아버님은 또 자신의 집에서 모셔야 하기에 이중고라고 했다.

  2013학년도 1학기. 노인복지실천론을 대학원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 과목의 수업시간에 우리는 “아무르”라는 영화를 보았다. 2012년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인데 주제는 앞서 나의 지인이 문의한 내용과 닮아 있다. 음악을 전공한 노부부만이 사는 중산층의 프랑스 가정. 결혼한 딸은 장성한 자녀가 있고, 가끔 노부부를 찾는다. 뇌졸중으로 불수가 되어 가는데도 시설에 가지 않겠다는 아내를 남편은 사랑과 헌신으로 돌본다. 그러나, 긴 돌봄은 남편을 지치게 하고, 딸은 엄마의 처절한 모습에 늙은 아버지에게 뭔가 대책을 요구한다. 늙은 아버지는 무슨 대책이냐며 소리친다. “네가 모실래? 아니면 시설에 보낼까?” 딸은 답을 하지 못한다. 결국 늙은 아버지는 어떠한 선택도 하지 못한 채 너무 무거운 돌봄의 짐을 아내와 함께 생을 마감함으로써 내려놓는다.

  영화가 끝난 뒤 학생들에게 물었다. 이 영화가 가슴에 와 닿느냐고... 학생들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아직도 자신들에게는 너무나 먼 미래이고, 자신의 부모세대는 아직 젊어 이 영화의 주인공 나이쯤은 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학생들에게 다시 묻는다. 부모들은 자식들을 노후준비라 생각하는데 자식들인 너희들은 부모의 노후준비가 되고 있냐고... 학생들은 자신들은 결코 부모님들의 노후준비가 아니라고 대답한다. 머지않아 노인들의 비율은 100명중 14명이 될 거라 한다. 우리에겐 아직 먼 미래이지만, 이미 가까이서 많은 노인들을 만나고 있고, 앞으로는 더 많은 노인들과 마주치게 될 날이 멀지 않았음을 이야기해 주는 대목이다. 이제 우리도 노인에 대해, 아니 고령화 사회에 대해 한번쯤은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 나에겐 너무 먼 미래이지만, 나의 부모님과 할머니 할아버지에겐 가까운 미래이고 또 현재이기에...

  고령화 사회에 대한 대안을 잘 짜야 성공한 나라가 될 수 있다. ‘아무르’에서처럼 암울한 노인들의 미래가 아니라 ‘아무르’의 남자 주인공과 나의 지인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성공적인 노인들의 미래를 그릴 준비를 해야 한다. 내가 노인이 되었을 때도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미래를 그려야 한다. 아직 정확한 답은 없다. 그러나 나의 관심과 그 답을 찾으려는 사회적 노력이 합쳐질 때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렴풋이 보이는 답의 방향은 젊은 나와 나이든 노인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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