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창작 ‘우아한 시체놀이’와 창의적 발견


집단창작 ‘우아한 시체놀이’와 창의적 발견

 

  이 놀이를 시작하고 얻은 첫 문장이 “우아한 시체가 새 술을 마실 것이다”라는 계시적인 문장이었기에 놀이의 명칭이 ‘우아한 시체놀이’가 되었다. 일상적으로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악취 나고, 썩고, 두려운 대상인 시체가 살아있는 인간의 행위인 술을 마시는 행위를 하면서 ‘우아함’, ‘새로움’의 개념과 마주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초현실주의자들이 추구했던 “삶과 죽음, 현실과 상상, 과거와 미래, 소통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높은 것과 낮은 것이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지각되지 않기 시작하는 정신의 어떤 지점”이 가시적으로 구현된다.

  ‘날개 달린 수증기가 열쇠로 잠긴 새를 유혹한다’, ‘세네갈의 굴은 삼색기의 빵을 먹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가녀린 애벌레는 무기력한 행렬과 악의적으로 경쟁한다’와 같은 글쓰기는 우연의 힘을 빌어 논리와 관습을 착란시키고, 시적이거나 우스꽝스러운, 그리고 놀라운 문장을 발견하는 기쁨을 준다. 통사 규칙은 유지되며, 문장 또한 문법적으로 정확하지만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독특한 문장이 얻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아한 시체놀이의 그림 버전은 역시 공동의 참여자들이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인간, 동물, 식물을 막론하고 대상의 상, 중, 하부를 그려 맞춰보는 시각적 결과물이다. 그 결과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하이브리드적 창조물이 탄생된다.

  앙드레 브르통은 이 놀이가 가능케 하는 시적 발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 창작물에서 우리를 고양高揚시키는 것은, 그것이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 수 없는 것의 흔적을 갖고 있으며, 시가 거의 할 수 없었던 가장 높은 단계의 표류를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에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브르통이 ‘표류’라는 말로 설명했듯이, 새로운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사회를 가두는 틀 밖으로 나가서 헤매는 과정이 필요하다. 초현실주의의 실험은 집단의 참여를 통해 우리를 시행착오에 빠뜨리고 표류시키는 체계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우아한 시체놀이’와 유사한 놀이로는 1920년대에 고안된 ‘정의내리기 놀이’가 있다. 이 놀이는 두 명이 하는 놀이로, 한명의 참여자는 “...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적고, 두 번째 참여자는 첫 번째 참여자가 적은 질문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가 생각한 답을 쓰는 것이다. 그 후에 결과를 맞춰보면 “(앙드레 브르통) 낮은 무엇입니까?/ (벵자멩 페레) 밤 무렵 벌거벗고 목욕하는 여인입니다”의 예처럼 문법적으로는 올바르지만 의미로는 서로 이질적이며 충격적인 시적 교착이 일어난다. 질문에 대답한 사람이 다음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놀이를 계속해 나갈 수 있다. 초현실주의의 질문과 해답 놀이는 발견의 기쁨과 놀라움, 감탄하는 삶의 즐거움을 누리게 한다. 또한 초현실주의의 이러한 실험은 목적 지향적 소통방식에서 벗어나,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발견적 소통 방식을 가능하게 한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 생각지 못했던 개념들 간의 인접성과 일치를 가속화시킴으로써 경직되었던 생각들이 해방되고 숨어있던 감정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우리도 새로운 아이디어나 참신한 문장을 얻기 위해 초현실주의자들처럼 ‘우아한 시체놀이’나 ‘정의내리기 놀이’를 시도해 볼 수 있다. 물론 이 놀이를 통해 새로운 문장이나 그림이 얻어진 뒤 ‘재미있고 신기하다’라고 느끼는 것에만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이를 어떻게 발전시키고, 여기에서 어떤 계시적 의미를 발견하고 의미화 하는지가 중요하다. 즉 무의미에서 의미화 작용으로 나아가고, 기존 의미를 해체시키고 다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순환 과정을 그룹이 함께 체험해봄으로써 창의성을 기를 수 있다. 초현실주의가 시도하고 있는 시적 실험의 의미는 선험적으로 답을 내리지 않음에 있다. 그리고 예기치 않은 결과를 찾아가는 과정에 집중하는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절대의 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열린 가능성 속에서 끊임없이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을 던지는 행위 속에서 창의성이 촉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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