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간의 연애 감정을 갖고 나와 만남을 잘 이어오던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특별한 사건 없이 그녀가 갑자기 연락을 끊었다. 내가 동성애자 ‘인권운동’ 모임에서 활동한다고 ‘커밍아웃’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후, 지인들의 인맥을 타고 몇몇의 동성애자 대학생들이 가벼운 친목 모임을 가졌다. 다들 대학 성소수자 단체 소속이었다. 처음 만나 각자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 내 소개를 마치니 주변의 반응이 마뜩잖다. 왜냐하면, 나는 동성애자 ‘인권운동’ 모임 소속이니까. 학내 성소수자 인권 모임에서 여러 학기 동안 활동하며 포스터를 뜯기고, 공간 사용신청에 난항을 겪고, “쟤네가 그 레즈비언이야?”라는 경멸 섞인 소리도 들어봤지만, 이렇게 사실적인 ‘위협’은 처음이다. 그것도, 같은 성소수자로부터의.

  위는 모두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하는 내 지인들의 이야기다. 많은 성소수자들이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나대고 있”으며 주변 사람까지 “아웃팅을 시키”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존재라 여기는 모습은 비단 어제오늘의 풍경이 아니다. 그들은 ‘아웃팅 당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며 자신의 성정체성을 철저히 사생활의 철창 안에 가둔다. 자신의 비밀을 아는 소수가 그것을 발설하지 않을까 불안해하며 문을 잠그고, 이성연애를 왜 하지 않느냐는 주변의 물음에 나중을 약속하며 열쇠를 버린다.

  그렇다면, 비성소수자들조차 목청 돋워 외치는 ‘아웃팅 당하지 않을 권리’란 대체 무엇인가. 사전에는 권리란 “어떤 일을 행하거나 타인에 대하여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힘이나 자격”이라 쓰여있다. 이에 따르면 아웃팅 당하지 않을 권리는, 모든 성소수자들은 자신의 성정체성이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사람에게만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하는 것 외엔 전혀 알려지지 않도록 타인에게 당연히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 또, 가능해야 할까.

  중학생 시절, 나는 레즈비언임이 주변에 소문이 나는 바람에 큰 고초를 겪은 적이 있다. 갑자기 싸늘해진, 심지어 폭력적인 주위 사람들의 태도 아래서, 대체 누가 내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폭로’했는지 분노에 찬 마음으로 몇 해를 끙끙대었다. 시간이 감에 따라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진학하며 내 비밀을 더 들쑤셔댈 사람들이 줄어드는 듯하여 안도하였고, 나 또한 내 사생활을 절대 내비치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 허나 정작 사라진 건 내 고민을 공유할 친구들이었고, 퀴어로서의 나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는 나의 삶이었다.

  아웃팅을 범죄시하는 순간, 성소수자로서의 내 시력은 급격히 떨어진다. 나는 소수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일삼는 개인과 사회가 아닌, 단지 내 성정체성을 알고 있던, 남에게 이야기할 가능성이 있던 사람에 분노하였고, 주변의 폭력적인 언행에 대해 도움을 요청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성정체성은 내 사생활일 뿐이고, 그로 말미암아 생긴 일은 결국 내 잘못이라 여겼으니까. 이러한 미동 없는 태도는, 모든 폭력에 대해 명백히 존재하는 가해자를 숨기고 피해자만 남게 한다. 더 이상 소중한 당신의 정체성을 죄목도 없이 가둬두지 말자. 버려진 열쇠를 되찾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당신의 ‘권리’다.

  여전히 철옹성 같은 이성애중심주의는 소수자의 정체성을 공적영역 밖으로 밀어내고, 동성애 이슈를 일상에서 빈틈없이 무시한다. 그러나 다수의 폭력이 비처럼 쏟아지는 곳에서도, 무지개처럼 희망은 존재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처음으로 자신을 성소수자라 정체화 했을 때의 심정을 곱씹어보자. 몫이 많은 자들의 놀음에서 불화를 일으키고, 목소리 큰 사람들이 감각 없이 설계해놓은 규범을 뛰어 넘는 것은, 우리의 ‘특기’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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