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 되어 개강을 맞이할 때면 해마다 머릿속에 비슷비슷한 고민들이 떠오른다. 학점관리라든가 취업준비 등 지극히 보편적인 것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고민도 분명히 있다. 누구나 각자의 사정을 안고 있겠지만, 필자의 경우엔 입 밖으로 내기엔 다소 조심스러운 고민도 한구석에 품고 있다. 길에서 ‘전도’하는 종교인들과 마주치게 되진 않을까 하는 염려, 바로 그것이다.

  종교인들과 마주치는 것이 왜 유난히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심도 있는 고민을 해보았다. 본인이 다소 예민하며 그들을 냉정하게 지나쳐버리지 못한다는 개인적인 원인을 제외하면 나름의 결론으로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는데, 첫째는 말을 섞고 있음에도 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전도도 결국 말을 주고받는 대화의 형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들은 말을 하고 싶지만 이쪽은 들을 의사가 없다. 다시 말해 한 쪽은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 말을 하지만 다른 한 쪽은 대화를 거부하기 위해 입을 연다. 이렇게 ‘주고받으려는’ 의지가 없어 대화의 기본 요건조차 갖춰지지 못하는 경우, 화자와 청자 사이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일방적이고 불편한 대화’가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원인은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근본적인 사고 차이에서 기인한다. 자기 삶의 근원 혹은 목표를 종교에서 찾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 사고 자체가 다를 수 있다. 필자 본인의 경우엔 SNS 매체를 이용하다 유독 종교적 삶과 진리를 강조하며 그에 순응하리라 맹세하는 사람들을 많이 접하곤 했는데, 그 때마다 그 강한 의지에 어리둥절해하며 근본적인 차이를 실감했다. 누군가는 ‘내 삶을 열심히 살 것’이라 다짐할 때 바로 곁에서 또 다른 누군가는 ‘신께서 주신 삶이니 열심히 살아야 할 것’이라 맹세하는 그 차이, 그 간극이란 얼마나 거대한 것인가.

  이렇게 차이가 명확한 상황에서, 독실한 종교인들의 깊은 신앙과 신념이라는 것을 단지 여러 마디 말로 전달하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지도 모른다. 그 몇 마디는 그들이 지닌 신앙 전체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얄팍한 것일 텐데, 그런 말로 누구의 마음을 열 수 있을 것이며 도대체 그 누구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 수 있을까. 게다가 조금만 생각해봐도 비종교인들의 입장에선 여태껏 알지 못했던 종교의 세계를 접한다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터인데, 아무리 해가 바뀌어도 그들은 여전히 종교적 진리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몇몇 단어만을 외치고 다니는 것이다. 이것은 설명하자면 바로 위에서 ‘대화의 요건’이 갖춰지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의 원인으로 제시했지만, 사실 조금 더 본질적인 관점에서 ‘대화’라는 형식 자체가 아예 역부족한 시도로 여겨질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이토록 불가능한 것을 구태여 하고자 할 때 불편함이 발생한다.

  거창한 듯 말했지만 저 두 가지는 누구나 느끼는 사실들이다. 그러나 여전히 신촌 거리를, 아니 교정을 걷다 보면 열렬히 전도를 하는 사람들을 간혹 만나게 되곤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전도자들’에게 조심스럽게 한 가지 질문을 - 물론 그들 또한 ‘온전히 말로써 전도’하는 것이 어렵다는 주장에 조금이라도 동의한다면 - 하고 싶다. 혹시 자신은 진실한 믿음에 의해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만족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까운 한 지인은 가장 바람직한 전도의 형식으로 ‘자기 개발’을 꼽았다. 스스로 참된 사람이 됨으로써, 자신이 몸담은 종교의 진리를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듣는 순간 무릎을 탁 치며 ‘아, 이것 괜찮다!’ 라고 소리쳤다. 자기만족 따위가 아닌 진정한 전도를 위해, 말하기 어려운 걸 굳이 말로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건 어떤가? 적어도 교내에서 만큼은 양쪽 모두 편안한 전도가 이루어질 수 있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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