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여성지 여성주간 김원주, 개화기 신여성 운동의 선구자 되다

  1907년 김원주는 12살에 ‘동생의 죽음’이란 시를 쓰며 일찍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 세 명의 어린 동생이 연이어 죽자 큰 충격과 슬픔에 빠져 쓰게 된 시다. 이 시는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보다 1년 앞서 쓰인 국문자유시라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1913년 이화학당에 입학한 후에는 문학동아리 ‘이문회’에서 활동하며 문학 활동을 이어갔다.  

  문학적 재능과 성숙한 가치관을 겸비한 김원주는 1920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주간으로서 여성주의 종합 월간지인 <신여자>를 발간한다. 그는 <신여자> 1호에서 개화기 여성의 헌장으로 평가되는 ‘신여자 선언’을 발표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람으로 대우치 아니하고 마치 하등동물과 같이 여긴다’고 말하며 당시 열악한 여성인권 인식을 비판한 것이다. 그는 여성에게만 정절을 강요하고 여성의 인격과 개성을 무시하는 기존의 성도덕을 비판하고 남녀평등사상에 기초한 새로운 남녀관계의 수립을 주장하기도 했다.

  <신여자>는 재정난으로 4호를 끝으로 폐간됐다. 하지만 <신여자>를 통한 김원주의 여성 계몽활동은 여성 인권의 중요성을 전파하며 여성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신식 교육을 받은 여성’이란 의미의 유행어 ‘신여성’이란 말은 여기서 탄생했다.

  김원주는 자유연애론을 주장하며 여성 계몽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당시 여성 대부분이 기존의 결혼 관습을 따라 정략 결혼하는 것에 반해 그는 청년기부터 여러 남성과 자유롭게 연애하며 결혼이라는 제도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정조란 육체가 아닌 정신에 있다는 ‘신 정조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1927년 1월8일 조선일보에 발표한 논설문 ‘나의 정조관’에서 결혼 여부보다 함께하는 동안 상대방에 대한 신의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글은 당시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지만 동시에 많은 여성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김원주는 37세의 나이로 속세의 삶을 접고 여승이 된다. 한 남성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출산했지만 그에게 버림받고 사회로부터 질타를 당하자 세상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여승이 된 후에는 인생에 대한 사색과 불교 정신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계속했다.

  이배용 명예교수(인문과학대학)는 「우리나라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에서 ‘한국 근대문학 초기에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그의 창작활동은 이후 여성들의 사회진출과 문학에의 길을 활짝 열어 놓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의 사회제도 및 가치관과의 갈등과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불교에 귀의한다. 이는 여성의 본능과 욕구를 구속하고 억압한 사회구조에 대해 저항했지만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을 보여준다.


△남녀평등을 넘어 민족해방까지 외친 한국 근대 최초의 여성작가 김명순

  김명순은 자신이 살아가던 조선 사회를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라는 시로 비판했다. 봉건적 여성관이 팽배한 사회적 상황은 그의 삶과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김명순은 일본 유학을 비롯한 근대교육을 받고 스스로 여성운동의 선구자가 되겠다고 다짐한다. 1939년에 발표된 김동인의 소설 「김연실전」의 주인공은 김명순을 모티프로 했다. 작중리 조선 여성을 노예의 처지에서 건지어 내리라, 구습에 젖어서 아직 눈뜨지 못하는 조선 여성을 새로운 세계로 끌어내리라’라는 주인공의 대사는 실제 김명순의 행동과 같다.

  김명순은 여성의 해방은 자유연애라고 주장했다. 그가 1926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나는 사랑한다’는 소설을 보면 주인공은 서로 배우자가 있음에도 결혼이라는 제도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선택한다. 「여성과 남성에 대해 생각한다」의 저자 송명희는 이 소설을 연애지상주의라는 주제의식이 가장 뚜렷이 제시된 작품이라고 평했다.

  1930년 발표한 두 번째 창작집 「애인의 선물」에서는 주체적인 연애관을 강조하기도 했다. 주인공은 어느 날 남편의 내연녀를 알게 되자 그 사실을 자신의 자유를 얻는 기회로 삼는다. 김명순은 남성에게 종속된 여성의 실체를 고발했고 여성이 주체성을 가져야만 남성과 인격적이고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회적 지탄에도 김명순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첫 시집인 「생명의 과실」의 머리말 ‘이 단편집은 오해받아온 젊은 생명의 고통과 비탄과 저주의 여름으로 세상에 내놓음이다’를 보면 당시 그의 밝지 않은 마음상태를 알 수 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유교주의에 젖어 있는 남성 중심의 사회로부터 심한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명순은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앞장서 나갔다.

  김명순의 문학관은 남녀평등을 넘어 민족해방으로까지 나아갔다.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그는 작품을 통해 강한 민족의식을 표출했다. ‘귀여운 내수리’라는 시에서 그는 ‘곱게 참아 겟세마네를 넘으면 극락의 문은 자유로 열리리라’며 ‘조선의 민중 너희는 피땀을 흘리면서 같이 살길을 준비하고 너희의 귀한 벗들을 맞아라’라고 말했다. 일제의 지배가 고통스럽지만 준비하면서 참고 있으면 반드시 민족 해방이 이루어진다는 희망을 이야기한 것이다. 당시 이육사의 광야 등 민족해방을 추구한 시는 많았지만, 여성으로서는 김명순이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좌절하고 만다. 두계 이병도 박사의 회고를 따르면 김명순은 집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원고를 정리하는 일 등을 했다고 한다. 그는 경제적으로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갈 수 없는 상태에서 기생출신 첩의 딸로서 차별 대우를 받은 데다가 여전히 여성에 대한 차별과 무시로 가득 찬 사회 분위기에 한계를 느꼈다.

  결국, 김명순은 조선인으로서 증오했던 일본으로 떠난다. 하지만 거기서도 가난과 정신병에 시달리며 힘든 시간을 보내다 생을 마감한다. 「여성시의 대명사」의 저자 맹문재는 ‘여성으로서 남성주의가 지배한 사회에 적응할 수 없어 쫓겨난 것이기에 안타깝기가 그지없다’고 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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