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0년 봄 강원도 원주에 살던 열네 살의 김금원(金錦園)은 머리를 사내아이처럼 땋고, 남자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수레에는 푸른 휘장을 둘렀으나 앞은 밖을 내다볼 수 있게 했다. 부모에게 여러 번 간청해서 어렵사리 여행을 허락받은 금원은 “새장에 갇혀 있던 매가 새장을 나와 저 푸른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것 같고, 좋은 말이 굴레와 안장을 벗어 던지고 천 리를 내닫는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금원은 제천 의림지로부터 금강산, 관동팔경을 다 보고, 그래도 미련이 남아 설악산까지 보고 서울로 갔다. 서울로 간 금원은 시골에서 성장해서 안목이 좁은 자신을 보았고, 성안을 두루 살펴보고 나서 여행을 끝낸다. 금원은 후에 이 여행의 경험을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라는 한문 여행기로 남겼다.

금원은 1817년 강원도 원주에서 양반의 서녀로 태어났다. 어려서 병을 자주 앓자 금원의 부모는 집안일을 가르치는 대신 글을 가르쳤다. 그래서 금원은 경전과 역사서를 공부했고, 시문에 능했다. 아마 조숙하고 총명했던 것 같다. 그녀 스스로 하늘이 총명한 재주를 주셨는데 문명한 나라에서 성취할 수 없단 말인가 생각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도 ‘여자로 태어나면 집안 깊숙이 문을 닫아걸고 경전의 법도를 지키는 것이 옳단 말인가, 한미한 집안에 태어났으니 분수껏 살다가 세상에 이름을 날리지 못하는 것이 옳단 말인가’라는 질문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강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돌아다녀 보며 증점(曾點:공자의 제자)이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 언덕에서 바람이나 쐬고 글이나 읊으며 돌아오던 일을 본받아 떠나리라. 부모도 붙들어 맬 수 없었던 당차고도 당당한 발걸음이었다.

그녀의 발걸음을 부추기건 바깥에도 있었을 것이다. 금원이 살았던 19세기, 서울을 비롯한 도회는 시장이 발달하고, 글을 하는 남성 지식인들은 시 모임을 통해 문예를 즐기는 한편, 여행을 통해 새로운 지식과 문명을 교환하느라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성들은 이것을 공유하지 못했지만, 이 무렵 여성들의 시선도 밖을 향하고, 그것을 실행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금원에게서 그 단적인 예를 본다. 그러나 호연지기를 기르고, 세상을 보고 경험해서 이치를 깨달았을지라도 그 실행의 끝은 달랐다. 그토록 경쾌하게 집을 떠났고, 기세 좋게 여행을 한 금원도 여행을 끝낸 뒤 새삼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금원은 남자 옷을 입은 자신을 보면서 여자가 남자 옷을 입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님을 인정하고, 오랜 소원인 여행을 두루 했으니 ‘이제 그만하고 본분으로 돌아가자’고 스스로를 타이른다. 집을 떠나 산수를 둘러보고 세상을 직접 볼 수 있었던 금원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가늠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제 나는 좋은 경치를 두루 즐겼고 오랜 소원을 이루었으니 그만 하는 것이 좋으리라. 본분으로 돌아가 부녀자의 일에 종사하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하고 남자 옷을 벗고 머리 올리지 않은 처녀로 돌아왔다. 그리고 김덕희의 소실이 되었다. 하지만 세상을 바라본 경험은 늘 가슴 속에 남아 있었고, ‘남자도 못한 일을 했으니 분수에 족하고 소원도 이루었다’는 자부심의 근원이 되었다.

결혼 후 금원은 남편 김덕희가 의주 부윤에서 물러난 뒤 함께 서울로 돌아와 용산에 머물렀다. 이 시절 금원은 경춘, 죽서, 운초, 경산 등 여성 시인들과 어울리곤 했다. 이들은 모두 시재(詩才)가 뛰어난 여성들이었다. 이들의 모임을 ‘삼호정 시사’라 불렀는데 삼호정(三湖亭)이라는 정자에서 모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모임은 서로를 적극 격려해 주고 지지해 주는 연대의 공간이자 조선 유일의 여성 시인의 모임이었다. 금원은 자신의 여행기를 모임에 관한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여행 기록과 삼호정의 시 모임에 대한 기록을 같이 놓고 있다는 것은 시 모임이 그만큼 중요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호동서락기>는 금원의 여행기이면서 동시에 삶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금원은 금강산, 설악산의 아름다운 경치와 서울, 의주 같은 도시의 번화함을 기록하고, 여행 틈틈이 쓴 시들을 수록하고, 삼호정의 모임에 대해서도 기록했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글을 남겼다. 글로 전하지 않으면 ‘지금의 금원’을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실에 대한 자각과 그것을 넘어서겠다는 당돌한 의지를 담은 여행과 그 기록인 <호동서락기>를 통해 금원은 자신을 둘러싼 경계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조선후기 여성들이 쓴 몇 편의 여행기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은 ‘여성’이라는 자기 발견이다. 그것은 규방 밖을 나서 세상을 구경하던 양반여성의 입에서도, 호기롭게 북산루를 다녀와 방안에 들어서는 순간 바느질거리를 발견하고 박장대소하던 의유당의 입에서도, 여행을 마친 금원의 입에서도 약속이나 한 듯이 나오는 말들이다. 비록 여행이 일부 여성들에게 주어진 기회였다 할지라도 이들에게 있어 여행은 각별한 경험이었고, 그래서 지금 몇 편 남지 않은 이들의 여행기는 새로운 여성 주체의 형성을 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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