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순간들’ 사진전 개최한 자연사박물관 윤석준 기술원

▲ 김나영 기자 nayoung1405@ewhain.net
▲ 최형욱 기자 oogui@ewhian.net


1974년 본교 자연사박물관에서 막 일하기 시작한 윤석준 기술원은 그의 연구실에서 죽은 새를 박제하는 데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당시 새에 관한 도감 내용이 충분하지 않아 박제 이전의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동물원을 찾아가 새를 관찰해야 했다. 그는 번거로움을 느껴 직접 동·식물 사진을 찍기로 결심했다.

이로부터 40년간 카메라로 찍은 자연의 조각을 모아 그는 11월19일~12월1일 ECC 조호윤 갤러리에 ‘기다림의 순간들’이라는 사진전을 열었다. 갤러리 벽에는 전국 곳곳에서 포착한 자연물 사진, 사계절이 흐르며 바뀐 이화의 모습을 담은 사진 등 작품 55점이 걸려있다. 윤 기술원은 “그동안 찍어온 풍경과 생태사진을 선별해 이번 사진전을 준비하게 됐다”고 말했다. 본교에서 약 41년간 재직한 그를 만나 이번 사진전뿐만 아니라 이화에서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자리를 가졌다.

윤 기술원이 이화와 맺은 인연은 특별하다. 그는 돌아가신 큰 형님 대신 막내 여동생과 조카딸의 학교 등록금을 내기 위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전북 고창에서 상경해 일자리를 구했다. 열일곱 살일 무렵 신촌로터리를 걷다 새와 열대어를 파는 상점에서 본 새(백문조)에 마음을 빼앗겨 그날부터 가게에서 일하게 됐다. 당시 상점의 단골손님이던 본교 의대 故 김헌규 교수(의예과)의 눈에 띄어 1972년부터 본교에서 일했다.

“알고 보니 그 상점은 주인이 혹독하게 일을 시켜 석 달에 한번 씩 종업원이 바뀌기로 유명했어요. 제가 1년 넘게 일하니까 교수님이 제가 동물을 잘 돌볼 것 같다고 생각하셨는지, 의대 연구실에서 실습용으로 쓰이는 개구리를 사육해보지 않겠냐고 설득하셨죠.”

그에게 주어진 특명은 ‘개구리 키우기.’ 전에 있던 연구실 관리인 두 명이 개구리를 잘 돌보지 않아 실습용 개구리가 계속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윤 기술원은 개구리를 돌보기 위해 365일 학교에 나왔다. 매일 개구리가 사는 유리 상자를 물로 닦고, 살기 적합한 온도에 맞춰주려 노력했다. 그가 애지중지 키운 개구리를 연구한 실험 결과로 논문을 낸 담당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이 수여한 국민훈장 동백장(대한민국의 정치·학술 등의 분야에 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하는 훈장 5등급 중 3등급)을 받기도 했다.

그는 박제에도 일가견이 있다. 그는 1974년 자연사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친구이자 훗날 교원대 생물학과 교수였던 故김수일씨에게 표본을 제작하는 기술을 배웠다. 지금은 문화재기능인 자격증을 소유하고 있다. 곤충 표본은 죽은 곤충을 살아있을 때의 생생한 모습으로 복원해 건조시켜서 조류나 포유류 표본은 부패한 사체를 해부해 속을 들어낸 후 뼈를 토대로 만들어진다. 그는 박제 과정을 “한 생명을 살리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그가 제작한 곤충·조류·포유류·무척추동물 등의 표본은 자연사박물관에 약 5만여 점이 넘게 보관돼 있다.

“부패되고 있는 사체를 깨끗하게 다듬어 본모습으로 복원하면 생물이 다시 부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부패한 사체에서 심한 냄새가 나 힘들 때도 있지만 다시 숨결을 불어넣는다는 측면에서 의미 있죠. 미국에서는 박제사를 종합예술가라고 여기기도 해요.”

윤 기술원은 표본 제작 외에도 동·식물에 관련된 일이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학교로 달려갔다. 이제는 학교 사람들이 동·식물과 관련된 일이면 그를 먼저 찾는다.

“밤에 집에서 쉬고 있을 때 보안 경비원으로부터 ECC 선큰가든에 새가 떨어져 있다는 전화를 받기도 했어요. 빨리 처치하지 않으면 새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학교로 뛰어가요. 생명을 살리는 일은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윤 기술원은 1995년 자연사박물관 증축이 결정됐을 때 자비를 들이면서까지 자연사박물관 건축에 애정을 쏟았다. 그는 박물관이 어떻게 건축되면 좋을지 알아보기 위해 미국행을 결정했다. 그는 학교에서 출장비를 지원받지 못하자 자비를 들여 떠났다. 영어도 할 줄 몰랐던 그는 보름 동안 미국 3대 자연사박물관 중 하나인 시카고 필드 박물관(Chicago Field Museum) 등을 탐방하며 자연사박물관 건축 자료를 수집했다. 자연사박물관 후배들은 그를 ‘미쳤다’며 말리기도 했다.

“자연사박물관은 저에게 전부였죠. 제가 몇 십년간 수집하고 만든 작품이 돋보일 수 있도록 학교가 건물을 증축해준다는데 열심히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어요. 귀국 후 건축 디자이너를 모아놓고 층마다 테마별로 전시할 수 있게 박물관을 지으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했어요.”

윤 기술원은 요즘도 자연사박물관에 전시할 표본을 수집하거나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주말마다 고양시에 있는 그의 농장이나 홍제천 등을 찾아간다. 때론 휴가를 내고 지방으로 더 멀리 나가기도 한다.

그는 작은 것을 자세히 관찰하면 새로운 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제 농장에 심은 장미 밭을 둘러보다 빨간 장미 속에 앉아 있는 청개구리를 우연히 발견했어요. 아마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장미꽃 속에 숨어 있는 것 같았어요. 장미 줄기에 가시가 있어 천적이 쉽게 다가오지 못할 것이고, 줄기·잎사귀 색과 개구리 피부색이 같으니까 자신이 변장했다고 생각했겠죠.”

윤 기술원은 이화인도 캠퍼스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세히 관찰하고, 흘러가는 순간들을 기억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리 인생은 우리가 방문한 장소에서 쌓인 추억으로 풍요로워져요. 지금 이 순간을 마음에 새기면서 살아가세요.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아요.”

이화와 40년간 함께해서 행복했다는 그는 2년 후 은퇴하면 또 다른 행복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저는 아마 프리랜서 생태 가이드로 일할 것 같아요. 가족 단위로 생태 관광 신청을 받아 신청 가족과 함께 여행할 거예요. 여행하면서 제가 여태까지 직접 체험하고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가 만나게 될 생태에 대해 설명하는 거예요. 가족들이 좋은 추억을 남길 수 있도록 틈틈이 단란한 가족사진도 찍어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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