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가 낳은 무명(無名)의 선구자들
이화가 낳은 무명(無名)의 선구자들
  • 박예진 기자
  • 승인 2012.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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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유관순, 박에스더, 황에스더 등의 이화인은 우리나라 근·현대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익히 알려진 인물만이 역사를 일궈낸 것은 아니다. 역사 속에는 숨겨진 인재가 많다. 그 중 한국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음에도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여성이 있다. 본지는 당대의 언론 보도를 통해 역사 속에 숨어있던 이화인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조선 최초의 요리책인 ‘조선요리제법’으로 세상을 바꾼 여성

1911년 22살의 젊은 여성은 인류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음식’에 대한 책자가 조선에 없다는 것에 유감을 느꼈다. 그 후 서울에서 손 맛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어머니 무릎 앞에 앉아 약 500 가지 음식의 요리법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이렇게 탄생한 책이 본교 방신영 초대교수(가사과)가 쓴 조선 최초의 요리 책 「조선요리제법」이다.

1911년 「요리제법」으로 처음 세상에 나온 방 씨의 책은 1917년 최남선이 만든 출판사인 신문관에서 「조선요리제법」으로 정식 출간 됐다. 책에는 한식의 가장 기초가 되는 국, 김치 조림 등 약 500개의 음식에 대한 조리법이 소개 돼있었다. 이 책은 실용서임에도 불구하고 당대 최고의 국어학자 이윤재가 교열작업을 맡기도 했다.

방 씨의 책은 처음 출판된 뒤 1년 만에 재판을 찍고, 그 이후에도 꾸준히 개정돼 총 10여 판을 찍은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였다. 심지어 이 책을 표절한 책들이 발간돼 1933년에는 저작권 침해 소송이 일어났다. 제목 앞에 부기(附記)된 ‘만가필비(萬家必備)’라는 표현대로 당대 조선 가정의 필수 요리책이었던 것이다.
특히 개정된 책에는 당대 조선에 서양 신문물이 밀물처럼 들이닥친 모습도 나타나있다. 일부 상류계층에서 외국 음식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하던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듯 외국음식도 책에서 상당분량을 차지한다. ‘숩(Soup)’이라는 장을 별도로 두어 ‘로서아 숩(Russia Soup)’, ‘조개 숩’ 등을 만드는 법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버터, 드레싱 제조법은 물론 커피 끓이는 법, 차 끓이는 법 등도 설명돼 있다. 마지막 장에는 특이하게도 갓난아기에게 젖(분유와 우유) 먹이는 법까지 수록돼 있다.

이 책을 통해 유명해진 방 씨는 정신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중 2년간 도쿄에 건너가 동경영양학교에서 연수를 한 뒤 본격적인 요리·영양 전문가로서 조선의 식생활 개선과 식품영양관리 등에 대한 계몽활동에 앞장섰다. 잡지「삼천리」1935년 3월 판에는 이화여전 가사과 교수를 소개하는 기사인 ‘신촌동산에 난연(爛然)하게 핀 대 이화의 프로페서들’이 실렸다. 기사는 ‘방신영 여사는 「조선요리제법」과 더불어 여사의 이름이 너무 유명하기에’라며 다른 교수들보다 간략히 소개했다.

또한 「이화70년사」에서는 방 씨를 ‘가사과 교수로서 한국 요리의 권위자이다. 우리나라 음식 요리법을 글로 적어 놓으신 최초의 분이 아닌가 한다. 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나직한 음성 모양으로 성격도 고우셔서 천하의 법 없이도 사는 분 같았다’고 적었다.

방 씨는 요리전문가로만 활동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근우회 임원으로서 항일여성운동에서 앞장섰고 조선여자교육회에서 여학교 설립에도 힘썼다. 또한 서울여자야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부인직업소를 설치해 가난한 부녀자의 자활을 돕기도 했다. 그는 ‘전통’에서 배운 지식으로 가장 ‘근대적’인 여성 활동을 한 여성이었다. 


△3천만 조선인의 기대주로 올림픽에 출전한 조선 최초 여성 대표선수 

1948년 우리나라 국기를 달고 처음 출전 한 제14회 런던 올림픽 대표선수단 67명 사이에 앳된 소녀 한명이 있었다. 이 소녀는 올림픽 3달 전 국내 대회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선수단에 합류하게 된 18살 박봉식(당시 이화여중 5학년)이었다.

박 씨는 한국 최초로 올림픽에 참가한 여성 선수다. 그는 런던 올림픽에서 원반던지기 종목에 참가했지만, 국내 대회에서는 빙상 종목을 석권하고 높이뛰기, 투포환 등에서도 이미 좋은 성적을 내던 다재다능한 선수였다.

1948년 4월 올림픽 출전선수를 선발하기 위해 열린 국내 대회에서 박 씨는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는 놀라운 성적을 보여주며 원반던지기 국가대표가 됐다. 당시 모든 신문사들은 이 같은 사실을 보도하며 ‘박봉식 양의 올림픽 파견 문제는 조선 여성 체육 발전의 앞날을 위해 중대한 의의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1948년 6월22일 저녁9시 부산부두에는 한국 최초 올림픽에 참여한 여성 선수를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가득했다. 박 씨는 1948년 6월20일자 「동아일보」를 통해 올림픽에 참가한 심정을 밝혔다.

“여자가 저 혼자이기 때문에 좀 섭섭해요. 앞으로 이런 대회에 우리 조선 여성도 많이 참가하기를 바라요. 전 조선 민족을 대표해 나가는 만큼 조선 사람도 이렇다는 것을 뽐내도록 힘을 다할 작정이에요. 기록이라고요? 과히 뒤떨어진 것 같지는 않아요.” 

하지만 실제 런던 올림픽에 간 박 씨는 부담감 때문에 하위권에 머물고 말았다. 조선의 언론들은 그의 성적에 대해 보도하며 다음 올림픽에서는 반드시 입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올림픽에 첫 여성으로 그리고 선수단의 홍일점으로 참가한 그녀의 사연은 해외에서도 화제가 됐다. 벨기에의 한 청년이 그에게 팬레터를 보내기도 했다. 청년은 그녀의 기사를 읽고 응원의 편지를 보냈다. 1948년 7월31일자 「자유신문」은 ‘스탠리 E. 웨이스라는 벨기에 청년은 박봉식 양에게 영국에 온 감상, 승리의 기록, 조선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녀의 친필 서명을 넣은 답장을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고 보도했다.

다음 올림픽에서 선전을 다짐하며 사람들의 기대주였던 박 씨는 불행하게도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 중 사망해 다시는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했다.


△선정적 염문 속에 요절한 기구한 운명의 조선 최초 여성 경제학사

1919년 경기도 여주의 한 총명한 소녀는 매일 예배당에 나가 백일기도를 드리며 상급학교 진학을 반대하는 부모님을 설득했다. 가까스로 부모님을 허락을 얻은 소녀는 상경해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학문에 열의를 보이는 이 소녀는 훗날 우리나라 최초 여성 경제학사가 된 최영숙(1923년 중등과 졸업)이다.

3·1운동 직후 어수선한 이화학당에 진학한 최 씨는 한 해 선배인 유관순을 보며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결심했다. 이화학당을 졸업한 최 씨는 다양한 언어와 사회주의에 대해 공부했다.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안창호 등 많은 독립운동 인사를 만나며 민족정신을 키우며 다시 스웨덴 유학을 결심했다.

최 씨가 굳이 스웨덴으로 유학을 결정한 이유는 스웨덴 출신의 여성운동가이자 교육운동가인 엘렌 케이(Ellen Key)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사회적 자유주의를 추구한 엘렌 케이는 1910~20년대 동아시아 자유연애와 여성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운동가로서 최 씨 또한 엘렌 케이 사상을 깊이 신뢰했다. 1926년 7월23일자 「동아일보」를 통해 그가 여성운동의 선진국인 스웨덴으로 유학을 떠난 것이 조선에도 알려졌다. 「동아일보」는 ‘최영숙 양은 사회과학을 연구하러 단신으로 만리타국인 스웨덴으로 7월13일에 떠났다. 그는 후일 고국으로 돌아와 몸과 마음을 오로지 고국에 바치기 위해 고생을 무릅쓰고 공부하러 멀리 떠났다.’고 보도했다.

배를 타고 약 2달 만에 스웨덴에 도착해서 최 씨는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직접 학비를 벌어 공부해야했다. 스웨덴을 오고자 한 이유였던 엘렌 케이가 1926년 4월 고인이 됐다는 것을 안 최 씨는 낙담했다. 하지만 그는 스톡홀름 인근 시골학교를 찾아가 스웨덴어를 배운 뒤, 1927년 가을학기에 스톡홀름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 1932년 5월 잡지 「삼천리」는 그가 정치경제학과를 택한 것에 대해 ‘최영숙 양은 전공을 살려 당대 조선 사회의 급무인 경제 운동과 노동 운동에 몸을 바치고자 했다’고 적었다.

입학 후 최 씨는 스웨덴 황태자 도서실에서 연구보조원 일을 시작했다. 그는 아돌프 황태자가 아시아를 돌며 수집한 자료를 스웨덴어로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아시아 언어와 스웨덴어에 능통한 최 씨는 학구열이 왕성했던 아돌프 황태자의 총애를 받았다. 이 기간 동안 최 씨는 스웨덴 지식인들과 폭넓게 사귈 수 있었다.
1931년 경제학 학사학위를 받은 최 씨는 스웨덴 생활을 접고 조선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조선을 떠난 지 9년만의 일이었다.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최 씨는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여행했다.

최영숙이 조선으로 돌아온 것은 스웨덴이 살기 고단해서가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에 비하면 스웨덴은 천국이었다. 최 씨는 1931년 11월 29일자 「동아일보」를 통해 스웨덴에 대해 소개했다.

“스웨덴은 나의 제2고향입니다. 그 곳 사람들은 외국인 대접을 극진하게 합니다. 더욱이 동양 여자로 제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후대를 한 몸에 받았어요. 그 곳은 아이와 여성이 자유롭고 힘 있게 뻗어 나가고 있습니다. 특히 공장 같은데서 노동하는 여공들은 일정한 노동시간과 휴가를 통해 정신적,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들은 노동복만 벗어 놓으면 유복한 숙녀들입니다.”

최 씨가 풍요로운 생활을 포기하고 귀국한 것은 사회과학을 공부해 조선의 노동자와 여성을 위해 일하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귀국 후 경제와 노동운동에 몸을 던져 살아있는 과학인 경제학을 실현해보고자 했다.

그러나 조선은 경제학을 제대로 공부했고 영어, 독일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고 국제 감각까지 갖춘 최 씨를 받아주지 않았다. 1932년 5월 잡지 「삼천리」는 이에 ‘조선사회는 아직 인텔리 여성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기자를 꿈꾸던 최영숙은 결국 외국어 교수나 교사 노릇을 하려고 애썼으나 아무도 받아 주지 않았다’라고 적혀있다.

결국 직장을 못 구한 최 씨는 여자소비조합을 인계받아 사람의 왕래가 많은 종로구 교남동에 점포를 냈다. 스톡홀름대학 경제학사의 직업이 콩나물, 감자 등을 만지는 장사꾼이 됐다.

자본이 없는 일개 구멍가게로 한 집안 생활비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생활이 어려웠지만 최 씨는 사회를 위한 일에는 발 벗고 나섰다. 이화학당 시절 은사인 김활란이 공민학교(초등학교에 취학하지 못하고 학령을 초과한 사람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한 교육기관)를 세울 계획을 말하자 만사를 제쳐두고 교재 편찬에 나서기도 했다.

1932년 4월 취직자리 알아보랴, ‘콩나물 장사’하랴, 책 편찬하랴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최 씨는 귀국한 지 채 5개월도 지나지 않아 몸져누웠다. 그는 진료를 위해 병원을 찾았다가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 스웨덴에서 귀국하던 길에 만난 인도 청년 미스터 로(Mr. Row)와의 관계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다. 병세가 악화된 그녀는 자신의 목숨이라도 구하고자 낙태수술을 받았으나 차도가 없었다.

며칠 뒤, 1932년 4월 23일 그는 홍파동 자택에서 27세의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최 씨의 유품 중에는 미스터 로를 향한 편지에는 세상을 달관한 듯 “돈! 돈! 돈! 나는 돈의 철학을 알았소이다”라고 쓰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