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 오봉교회라는 소박한 교회가 있다. 작은 것이 자랑이고 시골에 있는 것이 자랑인 그 교회의 목사님을 지인 몇 분과찾아 뵈었을 때 일이다.

목사님은 우리를 위해 큰 상 위에 금방 따온 여러 종류의 잎사귀를 하나씩 펼쳐 놓기 시작하셨다. 뾰족한 잎, 긴 잎, 가느다란 것, 동그란 것, 두툼한 것, 유난히 반짝이는 것, 백록색의털이 소복하게 나 있는 것 등등……. 너무나도 다양한 잎사귀들이 상 위에 가득 각각의 모습을 뽐내며 놓여졌다. 우리는 늘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잎사귀를 난생 처음 보는듯이 놀라며 바라보았다. 서로 다른 모양새와 서로 다른 색상의 잎사귀들은 한 화면에 모여 변화와 질서를 동시에 느끼게 하였으며 또한 자연의 큰 생명을  보여 주고 있는 듯 했다.
나는 대단히 세련되고 아름다운 현대미술을 보는 기분이었다.

함께 간 분들도 ( 그 중에는 큰 미술관 관장님도 계셨다. ) 그 아름다움에 감탄 했고 그곳에서의 시간 내내 우리는 그 생기 넘치는 퍼포먼스에 행복해했다.

 그 때의 인상이 너무나 강렬해서 나는 목사님을 모시고 어린 학생들을 위한 시간도 한 번 마련해 보았다.
 학생들을 위해서는 강원도 공연진 바닷가에서 주워 오신 조개껍질들을 펼쳐 보여주셨다. 반응은 역시 대단했다.

 어쩌면 이렇게 다 다른 모습일까?
 어떠면 이렇게 다 예쁠까?
 이것이 그 퍼포먼스의 결론이었다.

 그 목사님은 길게 설명은 안 하셨지만 그 두 번의 행복을 주는 퍼포먼스를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성을 살펴보고 그 가치를 알아보길 원하셨을 것이다.

 누가 더 크고 더 잘났는가의 기준이 너무나 뚜렷한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로써는 서로 다르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매우 신선했다.

서로 달라야만 존재가치가 있는 순수미술전공의 학생들에게는 더 더욱 신선한 충격일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 조개껍질들은 겸손하게, 야단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우리 마음을 평안하게 어루만져주는 듯 했다. 다른 조개보다 크다고 해서 군림하려는 것 같지도 않고, 작아서 부끄러워하는 것 같지도 않고, 다른 잎사귀가 더 예뻐 보이니 그 흉내를 내려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우리도 그렇게 자신의 모양을 있는 그대로 겸손하게 자랑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림 하는 나의 학생들에게 가끔 이런 얘기로 위로 아닌 위로를 할 때가 있다. “너는 네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표현하려 하지 마라. 네가 아무리 원해도 너는 너 이상의 것을그려내지 못할 것이다. 만일 근사한 무엇을 얻으려고 한다면 남의 밭에 농사 짖는 농부 같아서 가을에 한 개의수확도 가지고 오지 못 할 것이다. 농사는 자기 밭에 지어야 하는 것이다. 네가 부족하다고 느끼더라도  너는 네가 가진 것을 사랑해야 한다. 남이 가진 것을 기웃거리지 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누가 깨진 보도블럭 틈 사이에서 꽃을 피운 민들레가 온실 속 빨간장미보다 못하다고 얘기 하겠냐마는 그래도 우리는 빨간 장미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은 아닐까?

 너무 오랜 시간 비교하고 경쟁하며 지내다 보니, 또 경쟁에서 뒤쳐지는 두려움에 시달리다 보니 서로 다르다는 것에 대해 인정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소중하다는 것이 생소하기도 한 요즘이다.

 우리의 생각의 축은바뀔 수 있을까?

 한 때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복음찬송이 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비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꽤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빨간장미가 아니라서 괴로웠던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위로를 받았을 뿐이 아닐까? 나를, 또 당신을 사랑하고, 그리고 사랑 받고 있는가 진지하게 묻고 싶다.

그 시골교회 목사님은 여전히 빨간 장미를 흠모하는 우리들에게 민들레도 달개비도 바람꽃도 들국화도 다 사랑스럽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러시아의 작가도스토에프스키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그를 하나님의 의도하신 모습으로 보는 것이다.” 라고.

허약한 것만 같은 나를, 부족한 것 같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하길 바라고 작은 것이 자랑이 되고, 약한 것이 힘이 되는 것을 꿈꾼다.

 배추벌레는 배추밭에서만 해충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배추를 먹어야 하는 나 중심으로 본다면 배추벌레는 해충일 뿐일것이다. 그러나 배추벌레가 없다면 우리가 좋아하는 제비는 먹이가 없어 우리나라에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새들은 배추벌레가 생기는 시점에 맞추어 알을 낳고 부화한다고 한다.

 자연의 순환이 숭고하게 느껴지는 이 늦은 가을, 자연도 사람도 그리고 나도 “하나님의 의도하신 모습으로 보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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