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유당(1727~ 1823)은 그녀의 45세 되던 해인 1772년(영조 48년) 9월 17일에 출발, 동명 귀경대와 격구정을 보고 태조 이성계의 옛집인 본궁(本宮)을 둘러보았다. 1박 2일의 짧은 여정이었다. 동명은 함흥부에서 동쪽으로 60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지역으로 일출 구경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지금 우리는 가 볼 수 없는 곳으로 어쩌면 의유당의 일기로만 짐작할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싶다. 남편과 동행한 의유당의 여행은 화려했다. 군복 입은 기생 두 쌍과 아이 기생 하나가 말을 타고 나는 듯이 가고, 군악(軍樂)이 가마 앞에서 ‘늘어지게’ 연주하는데 말 두 마리가 앞뒤로 메고 가는 쌍교마를 타고 가니 그런 호사가 없었다. 지난 번 여행에서는 ‘봉우리 아래 악공을 숨겨놓고 한바탕 악기 연주를 시키고 군복 입은 기생은 춤을 추게’ 해서 흥을 냈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풍류를 앞세우고 떠났다. 지방 관리를 남편으로 둔 양반부인의 호사를 톡톡히 누린 셈이다.

의유당은 길을 떠나 서울의 시장과 다름없이 화려한 시장을 구경하고, 점심으로는 전복회를 먹고, 배를 타고 선유(船遊)를 즐기고, 바삐 저녁을 먹고 월출까지 보았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서론에 불과했다. <동명일기>에서 가장 재미있고 생기 있는 부분은 아마도 일출을 기다리는 초조함과 날도 새기 전에 숙소를 나서서 추위에 떨며 해가 뜨기를 기다리는 장면일 것이다. ‘행여 일출을 못 볼까 노심초사해서 밤이 새도록 잠도 자지 못하고’, 일출을 볼 수 있을지 사공에게 물어보게 하던 의유당은 볼 수 있을 거라는 대답에도 ‘미덥지 않아’ 계속 초조해 한다. 이렇게 자지도 않고 기다리던 의유당은 닭이 울자 얼른 다 깨우고 너무 일러서 못 떠난다는 관청 감관의 말도 듣지 않고, ‘발발이 재촉해서’ 끓여놓은 떡국도 먹지 않고 귀경대로 오른다. 그날 9월 18일은 양력 10월 중순부터 11월 초순 무렵으로 이때쯤 함흥 지역의 기온은 영하로 내려가는 쌀쌀한 날씨니 아마 무척 추웠을 것이다. 이른 새벽에 귀경대로 오르니 별빛은 ‘말곳말곳’하고 날이 새기는 멀었는데, 자던 아이는 ‘추워 날뛰며’, 기생과 비복은 ‘이를 두드리며’ 떨었다. 사정도 모르고 남편이 ‘일찍 와서 아이와 부인이 병나게 생겼다’고 걱정했지만, 의유당은 불안해서 한 소리도 못하고 추워하는 기색도 못했다고 쓰고 있을 뿐 그렇게 일찍 나온데 대해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의유당 일행은 일출을 구경했다. <동명일기>에서 일출에 대한 묘사는 특히 섬세하고도 화려하며, 생동감이 있다. 일출을 보고 싶은 초조함 뒤에 일출 장면이 펼쳐지기 때문에 이 대목은 더 극적인 느낌을 준다. 의유당은 기존의 관습적인 표현이나 관념적인 표현을 쓰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본 바로 그 현장의 느낌을 쓰고 있다. 그래서 신선하다. 해가 떠오르기 직전 만경창파가 붉어지며 하늘에 자욱하고, 물결소리 웅장하며, 물빛이 황홀하게 비치기 시작한 것을 두고 의유당은 이렇게 표현한다. ‘차마 끔찍하더라.’ 자연의 생동함, 웅장함을 마주하고 터져 나온 감탄이리라.

의유당은 구경을 마치고 나서 즐겁기가 ‘귀중한 보물’을 얻은 것 같다고 만족해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 여행은 ‘인생이 두루 괴로워 위로 두 분 부모님이 모두 계시지 않고, 알뜰한 참경(慘景)을 두루 보고, 형제자매가 영락하여 마음이 두루 괴롭고, 지극한 아픔이 몸을 누르니 세상에 즐거운 흥이 없다가’ 얻은 기회였던 것이다. 호사스런, 그러나 짧은 여행 뒤에는 일상을 누르는 무거운 현실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의유당은 ‘이 무지한 여자로서 구경’하고 호방하고 자유분방한 필치로 곧바로 그 여행을 기록했다. 다시는 얻기 어려운 기회일 것이기에. 18일에 돌아와 21일에 기록했다고 했으니 사흘도 지나지 않아 쓰기를 마친 것이었다.

의유당은 친정도, 시집도 명문가에 속하는 집안의 여성이었다. 언니의 딸이 정조의 비인 효의왕후가 되었으니 왕후의 이모였고, 남편의 여동생, 즉 시누이가 혜경궁 홍씨의 숙모였다. 그런데 의유당의 말년은 쓸쓸했던 것 같다. 12남매를 낳았지만 한 명만 남고 모두 일찍 죽었다. 말년까지 그녀를 보살핀 사람은 효의왕후였다고 한다. 70여 년을 사는 동안 다닌 몇 번의 여행은 그녀의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여행과 여행기에서 나는 18세기 말 여성에게 여행이 규방의 일상을 벗어나게 해 주는 ‘한 호흡’이었음을, 세계를 직접 체험하려는 의지였음을, 그래서 ‘나의 언어’로 세상을, 자연을 이야기하려는 시도였음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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