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을 통해 본 맑스 ‘제대로’ 다시 읽기
대선을 통해 본 맑스 ‘제대로’ 다시 읽기
  • 이채린 편집부국장
  • 승인 201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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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보 검증이 계속되고 있는 요즘, 역시나 올해도 후보들 간에 서로를 깎아내리기 전략이 계속되고 있다.

새누리당 김무성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이 “안철수 후보가 『안철수의 생각』에서 복지 확충 재원에 대해 ‘능력대로 내고 필요한 만큼 쓰자’고 말한 것에 대해 맑스가 공산주의를 주창하며 사용한 슬로건”이라며 안 후보에 대해 비판했다.

‘맑스=북한=공산주의=빨갱이=몰아낼 세력’의 사고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김 본부장에게 묻고 싶다. 대학 시절『자본』을 배운 적이 있는지. 그리고 맑스를 인용하는 것이 과연 강력한 비판이 되는지 말이다.

경제학자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에서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에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고 얘기한 것처럼 사회주의 국가는 대부분 패망했다. 하지만 대부분 사회주의 국가는 맑스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다. 맑스는 궁극적으로 사적소유를 노동을 착취하는 지배자가 없는 사회적 소유로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을 전환해야한다고 말했다. 또 지적노동과 육체노동의 분화를 폐지해 직접 생산자를 통제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맑스의 생각은 공산주의로 나아가지 못한 채 김 본부장이 비판하는 현실사회주의 모습으로 변질된다. 예로 들면 북한은 자신과 다른 노선을 걷고 있는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 확충에만 집중했고 소수에 편중될 수밖에 없는 권력의 성격 탓에 지배자 격인 당 간부를 양산해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맑스주의 본래의 목적은 상실된 채 대중을 호도하기 위해 사용됐기 때문이다.

이처럼 맑스가 잘못 해석된 사례는 비판할 수 있어도 맑스주의 자체는 비판의 도구가 전혀 될 수 없다. 오히려 신자유주의가 활개를 치며 양극화 문제를 낳고 있는 오늘날, 마르크스 다시 읽기가 절실히 필요하다. 오죽하면 머리는 ‘자율’ 현실은 ‘개입’이 오늘날의 경제상황이라고 말할까.

다시 대선으로 돌아오자. 맑스주의를 볼 수 있는 사례는 먼 곳에 있지 않다. 각 후보들의 공통 공약인 ‘경제민주화’에서도 볼 수 있다. 경제 민주주의는 19세기 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공산주의 체제의 경제적 측면을 묘사하는 말로 처음 쓰였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또다시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봐야한다. 각 후보들은 대부분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경제민주화를 반(反)기업 정책 등과 동일시했다. 일부 진보세력들은 경제민주화에서 제대로 된 맑스를 읽을 수 있다고 환영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결코 반(反)기업주의자가 아니었으며 기업이 커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커진 기업을 소수가 좌지우지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소유의 민주화를 얘기했을 뿐이다.

맑스는 분명 오늘날 다시 읽혀야 한다. 다만 대중을 호도하기 위한 혹은 비판을 위한 도구로 읽혀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본질인 맑스주의가 다시 논의돼야 한다. 자본주의를 긴장하게 하고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