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권력(5) 누가 사도세자를 죽였나
여성과 권력(5) 누가 사도세자를 죽였나
  • 박선영 기자
  • 승인 2012.1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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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남편을 버린 혜경궁 홍씨
▲ 김나영 기자 nayoung1405@ewhain.net

<편집자주> 본지는 리더십과 영특함으로 당당하게 권력을 행사했거나 권력 암투로 무고한 희생을 당하기도 했던 여성 역사인물에 관한 기사를 시대순으로 연재한다. 여성 권력자의 삶을 관련된 장소와 엮어 살펴보도록 한다. 


 궁중생활사 연구의 근간이 되는『한중록』은 정조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아내인 혜경궁 홍씨가 한 많은 궁중 생활을 하소연하기 위해 지은 책이다.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여동생에게 칼을 휘두를 정도로 정신적 문제가 있었고 생모인 선희궁조차 아들의 폭력적인 성격을 견디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혜경궁 홍씨는 그간 사도세자의 정신병을 감내하고 남편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는 비운의 여인으로 묘사돼 왔다.   

 하지만 노론 출신인 혜경궁 홍씨가 소론의 편에 선 남편 사도세자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평가도 있다. 사도세자는 그의 집권을 두려워한 노론의 이간질로 아버지인 영조의 미움을 샀고 끝내 죽음에 이르렀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을 통해 사도세자가 패륜적인 행동으로 영조의 신임을 잃었다고 기록하며 홍씨 가문의 책임은 회피하고 있다. 남편보다는 가문의 권력이 우선이었으며 아들인 정조를 왕으로 만들겠다는 야망을 실현한 혜경궁 홍씨의 삶을 따라가 봤다.


△혜경궁 홍씨에게 배신당한 사도세자가 죽음을 맞은 창경궁 문정전

 후문에서 272번 독립문행 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가면 창경궁에 도착한다. 창경궁의 중심이 되는 정전인 ‘명정전’의 뒤편에는 편전(임금의 사적 공간) ‘문정전’이 있다. 부채처럼 펼쳐진 팔작지붕과 색색의 단청으로 장식된 문정전은 낮은 월대(궁궐의 중요한 건물 앞에 놓이는 넓은 대) 위에 세워져 아담한 느낌을 준다.

 지금의 고즈넉한 분위기와는 달리 1762년 5월, ‘휘녕전’이란 이름을 갖고 있던 이곳에서는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명하는 살벌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도세자와의 갈등이 극에 치달은 영조는 월대 위에 서서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했다. 하지만 혜경궁 홍씨는 남편이 신하들 앞에서 모욕받는 모습을 보면서도 결코 앞에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아버지 홍봉한 옆에서 남편의 죽음을 부추겼다. 결국, 영조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결을 거부하는 아들을 뒤주에 가뒀다.  

 사도세자가 갇힌 뒤주는 문정전 앞에서 일주일이 넘게 방치됐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도세자는 좁은 뒤주에서 8일 만에 죽었다. 혜경궁 홍씨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가득 찬 아들을 문정전 앞에서 단호하게 돌려세웠다.

 혜경궁 홍씨가 이토록 단호했던 데에는 붕당(朋黨) 정치에서 노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세자빈 홍씨는 남편과 영조 사이에서 누구 편에 설지 고민했다. 하지만 사도세자 편이었던 대비 김씨와 왕비 서씨까지 승하하자 세자빈 홍씨는 가문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남편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섰다. 이러한 그녀의 선택에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미워해 그의 핏줄인 정조에게까지 불똥이 튈 것을 염려한 이유도 있었다.

 한편, 문정전에 방치됐던 사도세자의 뒤주로 추정되는 유물이 1993년 발견돼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사도세자의 한이 담긴 이곳에서는 남대문 방화사건의 범인과 동일 인물이 2007년에 불을 질렀던바 있다.


△정조가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기리며 지은 화성행궁 봉수당
 
 영조는 뒤늦게야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하며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사도세자가 복위됨에 따라 다시 세자빈 신분을 되찾은 홍씨는 환궁했다. 그의 목표는 오직 아들을 왕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정조가 아버지를 죽인 영조를 원망하기보다는 본인을 궁으로 불러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도록 교육했다. 영조는 이에 감동해 정조를 세자로 삼았다. 홍씨는 영조의 젊은 왕비인 정순왕후의 끊임없는 위협 속에서도 아들을 왕으로 만드는 데 결국 성공했다.

 화성행궁은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힘들게 왕이 된 정조가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화성에 신도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만든 것이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화성 행차 시 머무르기 위해 지은 궁으로 지하철 1호선 수원역에서 3000번 팔달문행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다. 이 성의 중심부에 궁궐의 정전(왕이 집무를 보는 건물) 격인 ‘봉수당’이 있다. 봉수당이란 정조가 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며 지은 이름이다.

 봉수당은 화성행궁의 건물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정면 9칸의 대형 건물로 지붕 귀마루에 얹힌 잡상(기와지붕의 추녀마루 위에 놓이는 토우)이 엄연한 궁궐로서의 위엄을 보여준다. 현재 봉수당은 일제강점기에 파괴돼 2002년에 재건된 건물이지만 <화성능행도병(華城陵幸圖屛)> 중의 한 폭인 혜경궁 홍씨의 환갑 진찬도에서 당시 봉수당의 화려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정조는 이곳에서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위해 조선 역사상 유례가 없는 성대한 환갑 연회를 열었다고 전해진다. 『진찬도』에 따르면 정조는 봉수당 앞 계단에서 마루까지 보계(잔치를 위해 임시로 만든 좌판)를 설치하고 백목장(白木帳)을 둘러 진찬 공간을 마련했으며 그 위로 대형 천막을 쳤다. 이 진찬연은 현재까지도 매년 10월에 열리는 수원화성문화제에서 재연되고 있다.

 정조는 왕이 된 후,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인 홍봉한을 비롯해 사도세자를 모함했던 외가를 전부 숙청했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죽음에 가장 큰 역할을 했을 혜경궁 홍씨에게만은 이같이 극진한 효를 행했다. 이는 홍씨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방관한 것에 대한 상처와 홍씨를 향한 효심 사이에서 정조가 평생 겪은 딜레마였다.


△자신이 지키지 못한 남편 곁에 끝내 묻히다, 융릉

 화성행궁을 나와 팔달문 정류장에서 46번 버스를 타면 도착하는 융건릉은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의 합장릉인 융릉과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인 건릉이 함께 있는 곳이다. 융건릉 정류장에 내리면 Y자 모양의 아름드리 향나무가 입구를 지키고 있는데 이 입구의 갈림길에서 왼쪽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융릉이 나온다. 이곳에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가 함께 묻혀 있다.

 융릉은 늘 아버지의 죽음을 가슴 아파했던 정조가 경기도 양주군에 있던 영우원(永佑園)을 수원으로 옮겨 만든 능이다. 정조의 유별난 정성 때문에 융릉은 다른 능과는 다른 창의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융릉의 장명등(돌로 만든 등)은 조선 전기의 8각 장명등과 숙종ㆍ영조 때 등장한 4각 장명등의 양식을 합한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석인(石人․무덤을 지키는 석재 인물상) 역시 예전에는 가슴까지 파묻혀 있던 목이 위로 나와 있어 사실적인 조각 기법이 사용됐다. 능의 뒤에는 종전의 능 형식에선 찾아볼 수 없던 둥근 담장을 둘렀다.

 혜경궁 홍씨는 환갑이 되던 해가 돼서야 비로소 정조의 수원 행차를 따라 이곳을 찾았다. 홍씨는 사도세자의 능에 가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함께 가기를 청하는 아들의 부탁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으며 조선 역사 이래 최대 규모의 임금 행차를 구경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죽은 지 32년 만에 그를 찾은 것이다.   

 혜경궁 홍씨가 아버지를 지켜주지 않았던 것을 원망했던 정조는 어머니에게 “평생을 아버지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며 다시는 아버지를 배신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혜경궁은 끝내 그녀의 과거 행동에 대해 진정한 회개를 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에게 은근히 사죄를 강요하는 아들의 태도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다. 

 혜경궁 홍씨는 정조가 죽은 후 15년을 더 살다 창경궁에서 눈을 감았다. 그녀는 그토록 가기 꺼려했던 사도세자의 능에 합장됐다. 그것이 결코 혜경궁 홍씨의 뜻은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약간의 연민이나 인정이라도 갖길 원했던 정조로서는 만족할 만한 부부의 재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