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건은 깊고 넓은 현실의 시적 형상화

1.글을 시작하며 최근 들어서 민족문학의 진로에 대한 우려 섞인 진단과 함께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90년대 즐어서 더욱 두드러진 이와같은 현상은 물론 그 나름의 이유와 그에 대한 현실파악이 있기 때문이다.

바깥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소·동구권의 급격한 변화와 함께 더욱 세력된 색채로 치장된 제국주의 독점자본주의 문학이론인 「포스트모더니즘 증후군」이 빚어낸 위기의식 소산이라 할만하다.

게다가 우리 문학계에서도 이에 편승한 자유주의적 물결의 도전 또한 만만치 않은 실정이다.

작년에 진행되었던 「김영현 문학논쟁」은 그 좋은 예이다.

사실 민족·민중문학은 안팎으로 도전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다소 호들갑스런 현실집단의 배후에 깔린 타협과 개량의 목소리를 갈라내야 한다.

오히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현실주의적 작품을 어떻게 내올것인가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모색해야할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이러저러한 현상을 소소하게 다룰 생각은 없다.

제한된 지면탓이기도 하거니와 자칫 추상적인 논쟁으로 흐르지 않게끔하려는 나름의 의도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미진한 과거의 성과를 점검하고 우리의 문학운동이 어떤 경로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현실주의 시에 대한 몇가지 생각 우선 평가대상으로는, 백무산의 장시「페레스트로이카 귀하」(실천문학 91년봄호)와 김정환의 시적 성과, 곽재구의 「서울세노야」(문학과지성사,1990)를 선정하였다.

이 작품들을 택한 이유는, 필자 나름의 민족문학 진영의 이데올로기적인 지형파악과 작품 성과에 기반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80년대 문학운동은 노동자계급 문학운동의 독자적 자기정립을 둘러싼 계급적, 이념적 분화과정이었다.

과학적 변혁사상의 대두와 함께 현실의 역동적인 힘과 전망을 포착, 작품 속에 형상화하기 위한 노력은 필수 불가결하게도 불철저한 계급적 기반을 지닌 민족문학론에 기댈 수 없고, 노동자 계급의 변혁적 전망을 통해서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시에 있어서 박노해와 백무산, 소설에서의 정화진, 방현석 등의 노력은 궁극적 지향체로서의 「노동해방」의 전망을 그리고 있는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다.

물론 부족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삶의 진실을 풍부하게 그리지 못하고 하나의 단면에서만 현실을 파악하고 있는 점 등은 노동자계급 문학이 앞으로 극복해야할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작품으로 돌아가서 우선 백무 산의 시를 살펴보자. 백무산은 첫시집 「만국의 노동자여」와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를 낸 우리시대 대표적인 노동해방의 시인이다.

특히 첫시집에서 두번째 시집으로의 변화과정은, 세계관적 측면에서 보건대 자생적 노동문학에서 노동해방문학으로 나아가는 「문학사적 발전」을 보여주공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노동해방문학의 한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문제는 「이념내용의 현실적 풍부」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데, 삶의 주요한 측면을 구체적으로 풍부하게 작품속에 그린다기 보다는 개별적 파편의 형상에 머무른다는 점과 근거없는(?) 낙관주의를 전망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페레스토로이카 귀하」는 시적 제재를 다루고 있는 시인의 시각과 접근방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이 시는 페레스트로이카 현상이 남한 노동자 계급에게 미치는 영향을 페레스트로이카의 오류와 한계의 측면에서 그리고 있다.

특히 이 시가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노동자에겐 천추의 한」인 페레-의 『시장 경제로의 전환』이라는 측면이다.

(p.33~39) 시장경제의 원리는 어느 한 측면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 전체」의 문제이며, 근본적으로 노동자에겐 예속의 굴레를 심어주고 있어 「이 나라 민중의 슬픔」과 「국제주의」와 「만족의 노동자의 눈물」을 배신하는것임을 말하고 있다.

필자는 두가지 측면에서 이시를 평가하고자 한다.

첫째, 현실변혁을 위한 남한노동자계급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페레현상을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려는 점은 일단 긍정적이라 하겠지만, 페레 현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인식과 평가가 피상적이라는 점이다.

현실적인 변화의 계기로써 시인이 포착하고 있는 부분을 보면, 『70여년 동안 무료함과 권태로움』(p.41)으로 설명하고 있다.

물론 세세한 변화의 과정을 서술해야 한다는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의 본직적인 측면을 포착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 이러한 현상에 대한 시민의 피상적 인식으로 말미암아 그것에 대응하는 노동자 계급이 어떻게 극복해내고 궁극적인 전망을 현실속에서 드러낼 것인지라는 문제에까지 이르지 못한다는 점이다.

페레현상이 남한 노동자 계급에게 「고통의 눈물」을 가져다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본주의적 모순이 심화된 격화된 곳에서 즉 「바로 이곳」에서 해결의 전망이 있다는 점을 그리고 있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자연주의적 요소의 잔존이라 할수있는데, 문제는 페레가 가져다준 영향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우리사회의 발전경향에 비추어 바라보는 현실주의문학으로써만 극복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시인 자신을 포함한 변혁운동 진영의 명확한 입장이 없는 혼란된 인식이 어디에서 나오는가하는 변혁운동의 객관적 상황과 그것의 극복전망에 대한 시인의 가치평가가 부재하는 점이다.

이 시의 이같은 한계점은 시에 있어서의 전형창출의 문제와 관련이 깊다.

초기시에서 보여주고있는 시적 관조주의와 감상주의, 노동해방의 전망을 근거없는 낭만주의(신념,의지)에서 찾고있는 점을 극복하기 위한 시에 있어서의 전형창출의 문제는 「적극적 지양태」로서의 현실모습에대한 인식과 가치평가를 시적으로 장악하는데 있다하겠다.

김정환의 「기차에 대하여」는 일종의 이념시의 형태를 띤 작품이다.

『철학의 근본문제가 아직/관념으로만 해결됐을 뿐/유물론적으로 해결되지 않.../』「불멸의 열사-기차에 대하여44」은 우리시대에서 「진정한 관념=유물론」의 정립은 중요한 작업임을 그의 시는 말하고 있다.

김남주의 옥중시편과 김정환의 시편들이 변혁적인 움직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지식인문학계역의 흐름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나름의 의의는 충분히 있다.

그러나 김정환의 시는 가슴으로 느껴지기 보다는 머리로 인식되는 철학시의 형태를 띠는 점으로 말미암아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 눈물에 대한 형상화가 미흡하다.

또한 시 내용의 흐름이 단절되고 있어 시적 메시지가 다소 감소되고 있다.

백무산과 김정환은 노동자계급 문학운동의 두 가지 흐름을 대표하는 시인이지만 삶의 진실을 풍부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변혁운동의 전망에 대한 형상화를 시적으로 포착하는 데에는 아직 부족하지 않은가 싶다.

곽재구의 시집 「서울 세노야」는 최근의 시중에서 돋보이는 작품으로 「분노와 사랑」에 대한 형상화로 이루어져 있다.

『3공 4공 5공 6공 끝없이 이어지는 곰팡이들의 행렬 속에서/그옛날 소 뺏기고 절양(절陽) 한농투사니 하나 떠오릅니다/울먹이며 휘두른 피묻은 조선낫 하나 말없이 그리워집니다』(「입춘 부근」중에서) 아릅답다.

「곰팡이들의 행렬」만이 판치고있는 세상에서 「피묻은 조선낫」하나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곰팡이들에 대한 시인의 「분노」가 절제된 채로 표현된 것이다.

그러나 곽재구의 시편들은 민중에 대한 따뜻한 감정을 주된 정조로 삼고있지만, 통일이나 미국에 대한 제재로 흐르는 경우엔 (「앵두꽃이 피면」「김밥」)민중의 해방된 세상의 전망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시적 제재의 본질을 꿰뚫는 해석의 깊이가 요청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맺음말 이상으로 다소 거칠게나마 최근 시작품을 중심으로 몇 편을 평가해보았다.

애초에 의도했던 바들이 얼마만큼 제대로 평가 속에서 반영되었는지 자못 의문스럽다.

그러나 문학이 현실에 대한 반영이라는 말을 들먹이지 않더라고, 최근 노동자계급 문학운동이 나아가야 할 점은 「더 많은 현실과 더 깊은 현실」을 풍부하게 드러내주는 데 그 성패가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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