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인이 1930년 1월15일 제2차 서울학생독립시위운동 계획 주도해

▲ 시내여학생만세사건이 보도된 1900년 2월20일자 동아일보 2면. 운동에 참여한 이화인의 사진과 함께 이들의 공판 일정이 보도됐다.

<편집자주>11월3일은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학생 독립운동 기념일’이다. 1929년 11월3일 광주에서 시작해 이듬해 3월까지 전국적으로 194교의 학생 5만4천명이 참여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은 3ㆍ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항일운동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 관장을 지낸 광주시교육청 서부교육지원청 장진 학교운영지원과장은 “학생의 날은 많은 사람에게 잊힌 기념일이 됐다”며 “이날은 청년들이 학생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국가와 사회를 위해 해야 할 일을 상기하는 기념일로 기억돼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이 운동에서 이화인은 학생 항일 궐기에 여학생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본지는 학생 독립운동 기념일을 맞아 광주학생운동에서 활약한 이화인의 이야기를 『이화100년사』, 『11.3운동』 등의 책을 통해 살펴본다.

1929년 10월30일 나주역에서 발생한 조선 여학생 희롱사건이 불씨가 돼 광주에서 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이화여고보) 학생들은 다락방 비밀집회를 열어 만세운동을 도모했다. 학생들은 ‘광주학생사건 옹호동맹 중앙본부’를 조직하고 11월15일을 이화 학생의 거사일로 결정했다. 그들의 교사였던 서명학은 『이화백년사(梨花百年史)』에서 그날 학생들이 운동을 준비하던 모습을 이렇게 회고했다. “다락방에 여럿이 들락거리는 것 같아서 한 학생을 붙잡고 물어보니 화장실에 간다고 해요. 그러려니 했는데 다음 날 아침 교실을 둘러보니 모두 실외화인 검은 운동화를 신고 있어요. 그러다 종소리가 나니 (학생들이 만세를 부르기 위해) 갑자기 밖으로 달려나갔습니다.” 서 교사는 다락방 비밀 집회를 알고 있었지만 누설하지 않아 서광진 교사, 박경숙 기숙사감과 함께 숨은 애국자로 꼽힌다.

11월15일 이화여고보 학생 약 400명이 교정에서 만세를 부르자 같은 정동에 있는 배재고등보통학교 학생 약 670명도 이 운동에 합세했다. 하지만 두 학교 학생이 무리지어 교정 밖으로 진출하려 하자 서대문 경찰서 기마대가 출동해 데모를 막고 주동자 54명을 연행했다. 저항 운동을 막기 위해 학교는 11월16일부터 휴교를 한다. 당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교장의 탄원이 있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연행된 이들 중 일부는 12월18일 퇴학 및 무기정학을 당했다. 이 만세운동이 다른 학교에 퍼져 11월17일엔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정신여자고등보통학교 등의 학교가 항일운동을 막기 위해 휴교에 들어갔다.

광주 학생 사건이 점차 알려지며 12월5일부터 서울과 각 지방의 학생들은 항일시위를 벌이고 시위의 일환으로 동맹휴학해 ‘제1차 서울학생 만세시위운동’을 진행했다. 이 사건으로 약 2천4백명의 일본 경찰이 출동해 약 1천4백명의 학생들이 구속된다. 이화여고보생들은 12월9일 독립 만세를 외치며 교정 밖으로 진출하려다 일본 경찰에 제지당해 교외 진출에 실패했다.

9일 항쟁에서 교외로의 진출을 차단당해 울분을 삭이지 못한 당시 이화여보고 4학년생 최복순은 그날 밤 여성 대중운동단체인 근우회에 찾아갔다. 근우회 회원 허정숙(이화학당 전문부․1919년졸)과 박차정은 당시 벌어지고 있는 학생들의 항일 궐기를 논하며 여학생들의 참여가 미온적이라고 개탄했다. 세 사람은 함께 여학생들이 취할 수 있는 대책을 논의했다.

최복순은 같은 반이었던 김진형, 최윤숙과 함께 진명 여고보, 배화 여고보, 여자 미술 학교, 경성 여상, 근화 여학교 등 각 여학교 학생들과 1월15일에 시위할 것을 결의했다. 이 소식을 듣고 당시 이화여전 음악과 졸업반 이순옥은 ‘제국주의 타도 만세’, ‘피압박 국민 해방 만세’ 등을 적은 전단을 만들었다.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의 이런 계획을 모르고 1월20일 궐기하기로 한 상황이었다. 여학생 시위 전날 서로의 계획을 알게 된 남녀 학생들은 여학생들이 계획했던 1월15일 오전9시30분에 일제히 만세를 함께 부르며 학교에서 종로 사거리로 나와 남대문 방면으로 진행하기로 결의했다.

계획대로 1월15일 약 5천명의 학생이 함께 거리로 나와 만세를 부른 이 운동을 ‘제2차 서울학생독립시위운동’이라고 한다. 『이화100년사』에 따르면 이 운동은 ‘시내여학생만세사건’으로 불릴 만큼 서울의 여학생들이 총궐기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 운동을 ‘시내여학생사건’으로 보도했다. 여학생들은 최복순 등이 준비한 태극기와 작은 깃발도 흔들었다. 이화여고보 교정 한복판에는 ‘조선의 청년 학생이여! 일제의 야만 정책에 반대하자’, ‘식민지 교육 정책을 전폐하라’, ‘광주 학생 사건을 분개한다’ 등의 문구가 검은 글씨로 적힌 붉은 천의 대형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독립운동사』에서 정세현 교수는 “서울의 12월 학생 궐기는 남학생들이 궐기 기세를 고양했고 1월 궐기에서는 남녀 학생의 대일 항쟁 기조가 같았다”며 “하지만 저항 운동을 전개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여학생들이 격문과 전단을 준비하는 등 사전에 상당한 준비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 운동으로 최복순은 8개월 징역을, 이순옥은 7개월 징역에 4년의 집행유예를, 근우회의 허정숙은 1년 징역을 선고받는다. 이후 근우회는 자연 소멸되고 독립운동은 지하로 숨어들게 된다. 『독립운동사』에서 독립 유공자 사업기금 운용위원회 류근창 위원장은 “이 운동은 3.1운동처럼 거족적 민족 운동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보이자 그것을 두려워한 일제의 책략과 탄압으로 더 이상 확대되지 못했다”며 “하지만 학생들은 굴하지 않고 광복군, 지하 단체 활동 등을 통해 항일에의 의지를 굳혔다”고 말했다.

참고문헌: 『이화100년사』, 『梨花百年史』, 『한국근세여성사화』, 『독립운동사』, 『梨花九十年史』, 『11.3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들』

* 11월3일 ‘학생 독립운동 기념일’
11월3일 ‘학생 독립운동 기념일’은 1953년 ‘학생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국가기념일로 제정됐으나, 1973년 유신 시대에 학생들의 반독재·민주화 투쟁이 계속되자 폐지됐다. 이후 부활 운동이 일어나 1984년 국가기념일인 ‘학생의 날’로 부활한 후 2006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이 변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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