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 토박이야.”

몇 년 전 개강 모임에서 친구는 자신을 서울 출신이라고 소개했다. 술자리 분위기가 무르익고 한 명씩 취기가 올라 누군가 술잔을 엎질렀는데, 잔뜩 취한 친구가 “아까운 술을 허클어브냐”고 타박했다. 알고 보니 친구는 전라남도 보성이 고향이었고, 방언을 쓰면 쉽게 볼까 봐 서울 사람 흉내를 낸 것이었다. 비단 이 친구뿐만 아니라 개중에는 ‘나는 사투리는 안 배워서 모른다’고 새침하게 답하기도 한다. 이처럼 방언은 점점 지방 언어만의 독특한 맛과 지위를 잃고 ‘모르는 말’, ‘안 배운 말’, 심지어 ‘숨겨야 하는 말’로 대우받으며 수난을 겪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몇몇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방언을 비틀어서 특정 지역을 비하하는 용어로까지 사용한다. 대표적인 지역 비하 용어인 ‘오오미’는 전라도 방언인 ‘오매, 워메’를 비튼 것으로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에서 2009~2010년 전라도 비하를 목적으로 사용하면서 나오게 됐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지역 비하 용어임을 자각 못 하면서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행태에 있다. 작년 연세대 응원단 ‘아카라카’는 연고전 현수막에서 ‘오오미’를 사용해 연세대 동문에 항의를 받은 바 있다. 아카라카 측은 사건 당일 오후에 ‘특정 지역이나 인물을 비하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고 홈페이지에 사과글을 올리고 문제의 현수막을 철거했다. 올해 <대학내일>에서도 기사 본문에 ‘오오미’를 썼는데, 항의 메일을 보내자 해당 기자는 “지역 비하에 대한 의도는 전혀 없었으며, ‘오오미 패기 보소’ 라는 느낌에서 재미를 추구하고자 차용했다”고 답변했다. 이처럼 방언을 숨기고, 혹은 비틀어 지역 비하 용어로 사용하거나 뜻도 파악하지 못하고 인터넷 용어 정도로만 인지하는 모습은 방언 본연의 가치를 퇴색한다.

방언의 가치는 단순히 지역민의 의사소통 기능을 넘어서 역사적, 문화적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제주 방언의 예스러운 음운과 어휘의 배경에는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제주도의 자체 방어력을 유지한다는 명분에서 시행된 ‘출륙금지령(1629~1830년)’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있다. 강제로 폐쇄적인 생활을 강요받은 역사의 산물이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방언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방언은 또한 문화적인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언어다. 어업 생활이 중심인 서태평양 팔라우 군도 사람들은 일부러 물고기에 다양한 이름을 지어 구별하고, 에스키모는 ‘눈(snow)’이 내리는 모습에 따라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는 눈(gana)’, ‘땅에 내려앉은 눈(aput)’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한국시인협회는 방언의 언어적 가치를 알리기 위해 2007년 『요엄창 큰 비바리야 냉바리야』라는 방언 시집을 내기도 했다.

가을이다. 추석에 고향에 내려간 누군가는 고향 사투리를 귀에 익도록 들었을 것이다. 자신이 자라온 환경에서 듣고 말하던 언어를 경시하는 태도는 여러 학문이 모이는 대학에서 모순되는 행동이며 반드시 지양돼야 한다. ‘오매’가 지닌 깊은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오오미’를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시인 김영랑은 장독대에 오르다가 붉은 감잎을 보고 문득 가을이 왔음을 깨닫는 누이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오매, 단풍 들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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