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화)은 한글이 반포된 지 566돌이 되는 한글날이다. 현재 유네스코(UNESCO)에서는 해마다 세계에서 문맹 퇴치에 공이 큰 사람들에게 ‘세종대왕 문맹 퇴치상’을 수여하고 있고, 한국어세계화재단은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세종학당을 전 세계 43개국 90개소에 운영하는 등 한글은 세계적으로 그 위상을 더해가고 있다.

  이에 본지는 한글날을 맞아 책을 통해 훈민정음의 창제 과정과 원리, 의의에 대해 살펴봤다.

 

△「세종실록」에 기록되지 않았던 훈민정음의 창제 과정

  백성이 쓰기 쉬운 글자를 만드는 것은 세종의 숙원이었다. 세종은 재임 말기에 세자에게 서류 결재권을 넘기면서까지 훈민정음 창제에 골몰했다. 「조선의 크리에이터 이도 세종대왕」에 따르면 세종대왕은 백성이 글로써 말하고 싶어도 문자를 몰라 표현하지 못하는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말했다. 백성이 문자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천자문 등을 통해 한문을 배우거나 차자 표기(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한국어를 기록하던 표기법)를 섞어서 써야 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들어 모든 백성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문자를 만들고자 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훈민정음 반포 전까지 비밀리에 이뤄졌다. 당시 양반은 학문을 자신만의 영역으로 여기고, 한자를 알고 학문을 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강대국에 예우를 갖추는 사대주의에 사로잡힌 신하들이 중국의 문자인 한자를 버리고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하는 데 반대할 것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잠자리에서 기침을 몇 번 했는지까지 일거수일투족이 기록됐지만 어디에도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관한 기록은 없다. 「백성을 섬긴 왕, 세종이 꿈꾼 나라」의 저자는 그만큼 비밀리에 한글이 창제됐으며, 세종이 자녀, 어의들과 함께 연구에 매진했다고 말한다.

  마침내 세종이 1443년 음력 12월 훈민정음을 창제하자 최만리를 비롯한 신하들이 반대 상소문을 올리고 세종과 설전을 벌였다. 「조선의 크리에이터 이도 세종대왕」에 따르면 일부 신하들은 사대주의와 한자, 이두(차자 표기법의 하나)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했다. 최만리가 백성들이 사용할 만한 실용적인 문자는 이두로도 충분하다는 주장을 펼치자 세종은 “설총이 이두를 만든 것은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해서이고, 언문도 마찬가지다. 그대는 설총은 옳고 나는 그르다는 뜻이냐”며 반박했다. 신하들이 “여러 사람에게 묻지도 않고 운서(한자를 분류해 의미, 독법 등을 해설한 책)를 가볍게 고치니 후세의 공론이 어떠하겠습니까”라며 반대하자 세종은 “그대들이 운서를 아는가? 사성과 칠음을 알며 자모가 몇인지 아는가?”라며 신하들의 음성학적 지식에 대해 반문하기도 했다.

  결국 훈민정음은 1446년 반포돼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세종은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하던 신하들과의 논쟁 끝에 이들을 투옥하기도 했다. 최만리는 석방 후에도 고향에서 은거하며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했지만 세종의 뜻을 굽힐 수는 없었다.

 

△입술 모양에서 탄생한 글자…천지인을 아우르다

  훈민정음의 자음은 입술, 혀, 입천장 등 조음 기관과 조음 방법을 관찰해 만들어졌다.  「백성을 섬긴 왕, 세종이 꿈꾼 나라」의 저자는 세종이 자음을 만들기 위해 자식들에게 소리를 내게 하고 입, 목, 혀 등의 발음기관을 살폈다고 전한다. 세종은 각각의 소리마다 달라지는 발음기관의 모양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구강 구조를 잘 알고 있는 어의와도 의논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세종은 발음을 할 때마다 움직이는 각 조음 기관의 모양을 그려가며 글자의 기본 틀을 만들어갔다. 「훈민정음」 해례는 ‘아음(어금닛소리)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폐쇄하는 모양을 본뜬 것이다’와 같이 제자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ㄴ은 혀가 위 윗몸에 닿는 모양을 본떴다고 설명한다.

  모음인 중성자 역시 상형 문자로, 우주 만물의 기본적인 세 요소인 천지인을 기본으로 만들어졌다. 「한글 박물관」에서는 하늘을 상징하는 점(‧), 땅을 상징하는 수평선(ㅡ), 사람을 상징하는 수직선(ㅣ)을 이용해 중성자가 제작됐다고 설명한다. 이 세 기본 글자에서 입을 오므리고(口蹙) 입을 폄(口張)에 따라 ‘ㅗ,ㅜ’, ‘ㅓ,ㅏ’가 만들어진다. 이처럼 모음 11자는 수평선과 수직선의 위, 아래, 왼쪽, 오른쪽에 점을 찍어 만들어진 것이다.

  ‘훈민정음’은 세종이 창제한 문자로서의 훈민정음 뿐만 아니라 이를 해설한 책 「훈민정음」도 가리킨다. 「훈민정음」은 문자사에서 문자의 창제과정, 창제연도가 유일하게 기록된 책이다. 「한글의 탄생-<문자>라는 기적」의 저자 노마 히데키는 “「훈민정음」이란 책은, 그것을 펼쳐 읽는 이에게 문자의 탄생이라는 원초 그 자체를 만나게 하는 장치”라고 말하기도 했다.

 

△마음을 전하던 ‘운문’이 ‘한글’이 되다

  훈민정음은 한글로 명명되기 이전 ‘언문’으로 불리며 조선 백성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한자나 이두 표기를 배우기 어려워했던 백성은 보다 쉬운 훈민정음을 배워 문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당시 백성은 훈민정음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사랑하는 임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백성이 문자 생활을 쉽게 할 수 있게 되면서, 훈민정음은 반포된 지 3년 만에 투서에 쓰였다. 「조선언문실록」에 따르면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3년 만에 익명의 언문 투서가 쓰였다. 익명서는 ‘하 정승아, 또 공사를 망령되게 하지 말라’며 당시 영의정이었던 하연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조선의 여인들에게 언문으로 쓴 편지는 연인을 향한 사랑 표현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선조 때의 기생 홍랑은 시인 최경창에게 ‘산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에게/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소서/밤비에 새 잎 나거든 이 몸으로 여기소서’하는 언문 편지를 보내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훈민정음을 통한 삶의 변화는 백성들 뿐 아니라 조정에서부터도 시작됐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상용해 백성들이 일상에서 충효 사상을 실천하게 하고자 했다. 「세종실록」의 세종 26년 2월20일 기록에 따르면 세종이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 효자, 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전까지 그림을 통해서 보급됐던 「삼강행실」은 훈민정음으로 된 해설을 덧붙여 재발행됐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과거 시험의 과목으로 도입해 하급 관리로 훈민정음을 익힌 자를 뽑도록 하기도 했다.

  이렇듯 백성들의 삶에 자리한 훈민정음은 반포 250년 후인 갑오개혁 때 이르러서야 우리말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 개화기에 철자법에 대한 연구가 주시경, 박승빈 등에 의해 이뤄졌다. 주시경은 한자 쓰기를 지양하고 고유어 쓰기를 장려하는 등 국어순화활동을 펼쳤다. 1910년에 이르면 음운(문자), 형태(품사), 구문을 구분한 종합적인 문법서가 만들어져 국어 문법 기술의 전통으로 확립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다듬어진 한글은 오늘날까지 세계 문자사에서 가장 발달된 글자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한글은 그림 문자, 단어 문자, 음절 문자, 음소 문자로 이어진 문자 발달사에서 한 단계 더 진보한 자질 문자(조음 위치와 같은 음운의 자질이 반영된 문자 체계)다. 영국의 언어학자 제프리 샘슨(Geoffrey Sampson)은 1985년 그의 저서에서 한글을  자질문자로 분류했다. 또한 자기 민족이 독자적으로 창안한 문자를 사용하는 곳은 중국과 우리 민족뿐으로, 훈민정음을 통해 인류는 그 기원과 족보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문자를 확보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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