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행하는 소셜 게임 ‘애니팡’을 중독처럼 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애니팡은 세 마리의 같은 동물모양을 맞추면 그 세 동물이 소리를 지르며 동시에 사라지는 게임이다. 높은 점수를 받을수록 같은 게임을 하는 자신의 친구들 사이에서 매겨진 순위가 올라가게 되며 그 점수를 통해 한 단계씩 레벨 업 할 수 있다. 이 게임은 ‘쥬얼 게임’을 그 원형으로 하는데 등록된 점수로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에 등록된 친구들끼리 순위를 매길 수 있고 한 시간에 약 여덟 판 정도로 게임횟수가 정해져 있으며 친구들끼리 서로 하트를 나누면 게임 한 판을 더 할 수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어김없이 쉬는 시간에 이 게임을 하다 문득 취업을 앞둔 대학생들의 모습이 겹쳤다. 입학하자마자 토익이다 자격증이다 스펙 쌓기에 바쁘고, 뒤처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습관적으로 자소서의 빈칸을 한칸 한칸 채워 넣는 우리들의 모습이 애니팡을 대하는 나의 자세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스펙의 기준을 하나씩 모아 나가고(물론 네 개, 다섯 개가 모이면 더 좋다) 이를 통해 점수를 얻는다. 1등을 하면 뭐가 좋은지, 20만점이 넘는 점수를 모으는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기계적으로 동물 얼굴을 맞춰가는 것이다.

  게다가 똑똑하게도 애니팡은 콤보라는 규칙을 이용해 사용자들로 하여금 ‘나는 지금 여기서 왜 이것을 하고 있는가’의 문제의식을 지닐 잠깐의 시간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연속으로 세 마리를 맞추면 점수가 더 쌓이는 콤보를 맞추려 눈에 불을 켜기 때문에 우리는 게임 속 1분이라는 시간 동안 다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다. 하트가 떨어져 잠시 지쳐 쉬고 있을 때조차 사회에 세뇌당한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듯 끌어낸다. “너는 스피킹 점수를 더 높여야하지 않을까”라는 멘트와 함께 하트 하나를 선물로 날리며 다시 한 판의 게임을 권유하는 것이다.

  유하의 시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2>에서처럼 우리는 각 기업과 정부에서 만들어 놓은 투입구의 ‘와꾸’를 맞추기 위해 부단히 나를 깎아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애쓴다. 물론 분명 이중에서도 삶에 대한 주체의식을 갖고 원하는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주위를 둘러보면 자신이 좇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혹은 진정 삶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보다 그저 사회에서 요구하는 보편적인 성공의 기준에 맞춰 무의식적으로 높은 순위를 차지하려 노력하는 학생들이 많아 보인다.

  20만점을 넘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고군분투하다 한순간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노력해서 점수를 따면 뭐가 어떻게 좋아진단 말인가. 이것은 끝이 없는 경쟁이다. 그러나 사회는 일렬로만 정렬된 틀이 아니다. 점수 얻는 랭킹싸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과 인생 자체를 즐긴다면 좀 더 넓게 보고 삶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힘든 일이지만 취업전쟁 속에서도, 애니팡 속에서도 나 자신을 찾아야겠다고 느꼈다. 유행과 관성 속에서 자신의 모습이 사라지지는 않는지, 항상 눈을 떼지 말고 지켜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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