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과 협력 사이, 두 여성 권력자의 상호 견제가 왕권을 견고히 하다

<편집자주> 본지는 우리나라 역사 속 여성과 권력에 대한 기사를 연재한다. 여성 권력자의 삶을 관련된 장소와 엮어 살펴보기로 한다.

 한 시대를 이끈 고부가 있다. 조선 최초로 왕을 대신해 정치를 한 세조비 정희왕후와 궁 밖으로 내쳐진 세자빈에서 대비의 자리까지 오른 인수대비다. 두 여인은 세조-예종-성종-연산군까지 4대에 걸쳐 왕위의 승계와 조선의 정치에 영향을 미쳤다. 사가에서부터 궁궐까지 경쟁과 협력을 하며 조선의 문물제도를 안정시켰던 정희왕후와 인수대비의 인생을 따라가 봤다.

∆왕을 탄생시킨 한 지붕 아래 두 여인

 시청역 2번 출구에서 나와 덕수궁 오른쪽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덕수궁 후문이 나온다. 주인을 잃은 덕수궁의 후문에는 소나무 몇 그루만 덩그러니 서 있다. 덕수궁이 세워지기 전, 이곳에는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의 정동 잠저가 있었다.

 정동 잠저는 세자를 제외한 왕자들은 궁 밖에서 살아야 한다는 법도에 따라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기 전 그의 가족들과 살았던 사가다.

 정동 잠저의 두 여인, 수양대군의 부인인 윤씨(훗날 정희왕후)와 며느리 한씨(훗날 인수대비)는 권력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던 수양대군의 야심을 자극했다. 당시 수양대군은 세종의 차남이라는 이유로 어린 단종의 왕위를 위협하는 인물이었다. 윤씨는 수양대군이 거사를 벌이기 전 대문 앞에서 망설이는 그에게 손수 갑옷을 입혀주며 말 위에 오르게 했다. 한씨는 아버지 한확의 권세를 이용해 수양대군이 명나라로부터 왕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아내와 며느리로부터 용기를 얻은 수양대군은 잠저 북문으로 나와 돈화문(북대문) 밖에 위치한 김종서의 집으로 향했다.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단종을 뒤에서 보호하고 있는 김종서를 먼저 제거해야 했기 때문이다. 1453년 10월10일, 수양대군이 정적인 김종서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는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한 지붕 아래서 고부의 연을 맺고 있던 두 여인은 결국 왕을 탄생시켰다. 수양대군(세조)이 왕위에 오르면서 윤씨는 정희왕후가 됐고 며느리 한씨는 남편인 도원군이 의경세자로 책봉되며 세자빈 수빈이 됐다.

 그러나 의경세자의 요절로 21살의 나이에 과부가 된 한씨는 중전의 꿈을 하루아침에 잃게 됐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조선 초기 두 여걸의 역사적인 신경전이 시작됐다. 총명한 수빈을 총애했던 세조는 며느리의 부탁대로 어린 둘째 아들이 아닌 손자 월산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했다. 그러나 수빈의 야망을 경계한 정희왕후는 세조를 설득해 아들 예종을 세자에 앉혔다. 예종이 왕이 되자 수빈은 궁 밖으로 쫓겨나 외로운 사가 생활을 하게 됐다.


∆의경세자에 대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내의 마음이 담긴 수국사

 지하철 6호선 구산역에서 내려 서오릉행 9701번 버스를 타고 3분 정도 가면 황금빛 사찰이 한눈에 들어온다. 수수한 단청과 낡은 목재로 이뤄진 일반 사찰과 달리 건물 안쪽까지 황금으로 칠해진 이 사찰은 서울 시내 유일한 황금사원인 수국사다. 이 사찰의 건립은 일찍 떠난 아들을 가여워하는 세조의 부정(父情)에서 비롯됐다. 세조는 요절한 의경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왕 명의로 이 사찰을 창건했다.

 그러나 건립 초기의 수국사는 검소하다 못해 부실하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재목은 질이 낮고 급하게 세운 기둥은 곧 쓰러질 것 같았다. 세조가 백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최소한의 비용으로 1년 만에 절을 지었기 때문이다. 예종이 즉위하면서 궁 밖으로 나가 살게 된 한씨는 수국사 대웅전에서 불공을 드리며 남편의 명복을 빌었다.

 그러나 초라한 수국사는 한씨가 인수대비가 되며 새롭게 중건됐다. 예종이 병으로 일찍 죽자 한씨의 아들인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르며 한씨는 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됐다. 그는 왕실에서 절약한 물품을 쌀과 베로 계산해 공사 경비로 쓰도록 했다. 또한 쌀 100섬을 시주하고 사찰 집기 등을 여유 있게 마련했다.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일국의 세자빈에서 궁 밖으로 내쳐지는 신세까지 경험했던 인수대비는 수국사를 중건함으로써 남편과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했다.

 정희왕후 역시 수국사 재건 공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세자의 후계를 정하는 과정에서 며느리인 인수대비와 신경전이 있었지만 아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는 아들을 먼저 보내고 피부병에 시달리는 세조를 간호하며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인 죗값을 치른다는 생각으로 불교에 정진했다.

 세조, 정희왕후, 인수대비의 마음이 한 데 모여 지어진 수국사는 당대 가장 아름다운 사찰이라 평가받던 봉선사와 비교될 정도로 형형색색의 화려한 단청이 장식돼 있었다. 한편, 현재의 황금사원은 한자용 주지스님이 한국의 에메랄드 사원(방콕에 위치한 태국의 대표 사원)을 만들겠다며 1995년 개조한 것이다.

∆정희왕후가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창덕궁 보경당
 
 종로구 창덕궁의 편전인 선정전의 북행각을 지나 동서로 나란히 세워진 영광문과 헌선문을 통과하면 울창한 숲이 나온다. 조선 후기의 화원들이 궁궐을 그린「동궐도」에 따르면 이곳은 조선 후기 후궁들의 처소로 쓰인 보경당이 있던 자리다.

 그러나 조선 초기, 원래 이곳에서는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대왕대비 혹은 왕대비가 어린 왕을 대신해 정치를 하는 제도)이 이뤄졌다. 예종이 승하한 후, 정희왕후는 왕실의 최고 어른이라는 이유로 조선의 최고정책결정권자가 됐다. 정희왕후는 인수대비의 차남인 자을산군(성종)을 세자로 삼았는데 성인인 장자 월산군에 비해 배후에서 정치에 관여하기 쉬울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희왕후가 조선을 다스린 보경전에서의 7년은 왕권이 안정된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이곳에서 종친 정리작업을 통해 왕권을 안정시키고 종친의 관리 등용을 법으로 금지했다. 왕실의 고리대금업을 엄단하고 농업과 잠업을 육성하는 데 노력하기도 했다. 또한 단종비 송씨의 신원을 복구해 단종에 대한 죄의식을 씻고자 했다.

 정희왕후는 인수대비에게 호의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 수렴청정을 양보하려 했을 정도로 인수대비의 총명함만큼은 인정했다. 유교적 학식이 풍부하고 정치적 고집이 있던 인수대비는 정희왕후를 궁 안에서 유일하게 견제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인수대비는 세조 즉위의 일등공신이자 당대 최고권력자인 한명회와 사돈을 맺어 성종을 지켜주는 또 하나의 세력이 됐다. 그는 최초의 여성 윤리서 「예학」을 편찬해 성종대 유교 문화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두 대비의 리더십과 현명함은 성종이 조선의 문물을 정비하고 완성하는 초석을 마련했다. 정희왕후의 노련한 정치 감각과 인수대비의 적절한 견제는 젊은 왕이 신하들로부터 주체성을 지킬 수 있도록 했다.

 고부는 말년에는 서로를 의지하며 궁에서 함께 늙어갔다. 그들은 함께 온양에서 온천을 즐기기도 했다. 각자의 아들을 두고 왕위 다툼을 했지만 세조가 무고한 희생을 치러가며 힘들게 얻은 왕권을 반(反)세조 세력으로부터 지키고자 한 마음은 같았기 때문이다. 정희왕후는 손자인 성종이 남편의 정국을 훌륭하게 발전시키는 과정을 보며 인수대비 옆에서 행복하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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