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권력(2) 조선 최초의 퍼스트레이디 신덕왕후 강씨
여성과 권력(2) 조선 최초의 퍼스트레이디 신덕왕후 강씨
  • 박선영 기자
  • 승인 2012.09.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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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정쟁(政爭)의 희생자, 신덕왕후
▲ 김나영 기자 nayoung1405@ewhain.net

<편집자주> 본지는 우리나라 역사 속 여성과 권력에 대한 기사를 연재한다. 여성권력자의 삶을 관련된 장소와 엮어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시대에 최초로 권력을 가졌던 여인이 있었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자 태종 이방원과 치열한 권력 암투를 했던 신덕왕후다. 태종의 복수 때문에 죽어서도 쫓겨나 듯 무덤의 위치가 바뀌었던 신덕왕후. 여전히 그 한을 간직하고 있는 그녀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신덕왕후에 대한 태조의 깊은 사랑이 담겨 있는 중구 정동 정릉 터

 시청역 1번 출구에서 나와 덕수궁 뒤쪽으로 걸어가면 중구 정동에 위치한 영국 대사관이 나온다. 현재 대사관이 자리 잡고 있는 이 터는 신덕왕후릉이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장되기 전에 있던 곳이다. 지금은 주변에 빌딩이 빽빽하게 서있지만 한 때 이곳은 일반 왕릉의 규모와는 비교할 수 없는 넓은 묘역이 형성돼 있었다.

  태조는 사랑했던 아내인 신덕왕후 강씨가 병으로 갑자기 죽자 1396년 이곳에 강씨의 능역을 조성하고 정릉이라고 칭했다. 또한 태조는 죽어서까지 아내와 함께하기 위해 그녀의 봉분 옆에 자신의 봉분을 만들었다. 이 자리에 있던 신덕왕후의 능은 정교한 석조물로 장식됐고 그 규모는 현재 동구릉에 있는 태조의 능보다도 컸다고 전한다. 태조가 부인의 능을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신덕왕후는 이러한 태조의 총애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줄 알았던 여인이었다. 태조는 외모가 아름답고 유력 권문세족의 딸이었던 강씨를 매우 아꼈다. 결국 강씨는 왕의 신뢰를 바탕으로 첫째 부인인 한씨의 아들 6명을 제치고 자신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 배경이자 한씨의 아들인 태종 이방원이 평생 신덕왕후를 증오하게 된 계기였다.

 태종 이방원이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왕위에 오르자 정릉은 본래의 장엄함을 잃게 됐다. 정릉은 ‘능을 보존하는 데 국가재정 낭비가 심하다’는 상소가 올라올 정도로 넓었는데 이에 태종은 정릉 100보 밖까지 주택이 건설되는 것을 허가했다. 정릉의 울창한 숲은 신하들이 저택을 짓기 위해 나무를 베어내며 크게 훼손되기도 했다. 이미 왕위에서 내려온 태조는 아내의 능이 파괴되는 모습을 보며 남몰래 안타까워했다고 전해진다.

 태조가 죽은 후 태종은 왕후의 능을 아예 도성 밖으로 옮겼는데 이장 과정에서 파괴된 정릉의 모습은 폐허 그 자체였다. 신덕왕후의 봉분이 크게 깎이고 능역 안에 세워졌던 정자각이 헐렸으며 석물은 땅에 묻혔다. 능을 빽빽하게 매웠던 나무와 석재는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공간이었던 태평관 공사에 사용됐다.

 또한 태종은 태조를 신덕왕후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에 태조릉인 건원릉을 조성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새어머니와 권력을 두고 다퉜던 태종의 분노는 죽어서도 함께 하길 원했던 태조와 신덕왕후의 사랑을 갈라놓은 것이다. 태조가 아내를 사랑해 정성스럽게 꾸몄던 정릉은 이렇게 역사 속에 모습을 감췄다.

△한 많은 신덕왕후가 다시 묻힌 성북구 정릉동 정릉
 
 이대역에서 171, 172번 신촌행 버스를 타고 40분 정도 가면 도착하는 성북구 정릉동 정릉은 많은 연인들이 찾는 데이트 장소다. 시원한 계곡물이 흐르고 나무가 많아 무덤이라기보다는 울창한 숲에 온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정릉 입구에 있는 아름드리 나무를 지나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작은 무덤이 있다. 바로 이곳이 태종의 명으로 중구 정동에서 이장된 신덕왕후의 왕릉이다.

 정릉의 모습은 조선 최초의 왕후의 무덤이라는 설명이 무색할 정도로 일반적인 왕릉의 형식을 갖추지 못했다. 일반적인 조선 왕릉에 있는 난간석, 병풍석, 무인석 등을 신덕왕후의 정릉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능의 맞은 편 아래 정자각에 위치한 소전대(제례를 지낸 후 축문을 태우는 의식 도구)의 경우 정릉동 약수터에서 주전자 받침대로 쓰이다가 2008년 본래의 용도가 밝혀져 정릉으로 돌아왔다.

 정릉은 무덤조차 찾을 수 없는 상태로 방치되다가 선조 때 다시 발견됐지만 헌종 때 비로소 초대 왕후의 능으로 복원됐다. 복원될 때 정릉 일대에만 비가 많이 내렸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신덕왕후가 200여 년 동안 쌓인 한을 푼다”며 이날 내린 비를 ‘세원지우(洗怨之雨, 한을 씻어내는 비)’라 불렀다. 그러나 이조차도 조선 왕릉의 격을 갖춘 완벽한 복원은 아니었다.

△신덕왕후를 향한 태종의 경멸이 표출된 청계천 ‘광통교’

 을지로입구역 2번 출구에서 청계천 방향으로 쭉 올라가면 ‘광통교’라는 비석이 세워져있는 돌다리가 나온다. 광통교 밑으로 가기 위해 도로 아래로 내려와 청계천을 걷다보니 연인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앉아있다. 강가에 앉아 사랑을 나누고 있는 연인들이 그늘 삼아 앉아 있는 광통교는 사실 의붓어머니를 경멸했던 태종의 분노가 서린 곳이다.

 태종 때 만들어진 도성 최대의 다리인 광통교는 정동에 있던 정릉이 파괴될 때 남은 석물을 가져와 세운 것이다. 현재 성북구에 있는 정릉이 석물이 적어 휑해 보이는 이유다.

 태종은 도성의 모든 사람들이 광통교를 밟고 지나가게 함으로써 신덕왕후의 기를 짓누르려 했다. 600년 전 어가(임금이 타는 가마)와 사신 행렬이 이 광통교를 밟고 지나가거나 일반 백성들이 이 위에서 다리 밟기, 연날리기 등 민속놀이를 했다.

 광통교의 교각에는 정릉에서 가져온 신장석(神將石, 무덤을 수호하는 돌)이 거꾸로 세워져 있다. 태종은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신덕왕후를 모욕하기 위해 그녀를 지키던 신장석을 똑바로 놓지 않았던 것이다. 신덕왕후를 폄하하고자 했던 태종의 의도와 달리 장식이 정교하게 조각돼 있어 다리에 얽힌 사연을 모른다면 ‘아름답다’고 할 만하다. 실제로 이 신장석은 고려말 조선초기에 유행했던 당초 문양과 구름 문양이 새겨져 있어 예술사적 가치가 높다.

 태종에게 수모를 당했던 신덕왕후의 운명처럼 광통교도 아픈 역사를 겪었다. 1910년 광통교 위에 전차 선로가 놓이면서 다리가 크게 훼손됐고 1959년에는 청계천 복개 공사로 도로 밑에 묻혀 한동안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청계천이 복원되며 광통교는 현재의 위치에 다시 옮겨 세워지게 됐다.

 살아서는 태조의 사랑을 받으며 조선 최초의 ‘권력을 가진 여인’이었지만 죽어서는 갖은 수모를 겪었던 신덕왕후. 복원이 유명무실한 정릉과 앞으로도 사람들이 밟고 다닐 광통교가 여전히 그녀의 한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