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을 것인가 없어질 것인가: ‘대학살생부’에 대한 단상
있을 것인가 없어질 것인가: ‘대학살생부’에 대한 단상
  • 양승태 교수(정치외교학과)
  • 승인 201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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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햄릿>의 유명한 대사 “to be or not to be …"를 “사느냐 죽느냐 …”로 번역한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것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 독백 전체의 맥락이나 영어 ‘to be’의 의미를 고려할 때 정교하지는 않은 번역으로 생각된다. 그 맥락에서 ‘to be’는 단순히 살고 죽는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인간으로서 이 세계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주인공 나름의 포괄적 성찰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교육과학부는 재정 지원을 제한할 대학과 더불어 폐교나 다른 대학과의 통폐합이 불가피한 부실대학의 명단을 발표하였다. 오래 전부터 예고된 정책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특정 대학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으로서의 ‘있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존재성 자체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교육과학부의 상기 정책에 찬성이다. 현재의 대학 문제는 조선조 후기의 서원 문제와 유사하다. 대학설립 허가의 남발이 대학교육 부실의 주요 원인이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고등학교 졸업생의 80퍼센트가 대학에 진학할 정도로 대학이 많다. OECD국가 가운데에서도 최상위에 속한다. 그런데 전체인구의 80퍼센트가 제대로 된 대학교육을 받았다면 대한민국은 이미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교양과 깊은 식견을 갖춘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그와 같은 교양인 층이 사회의 주류를 이루었을 경우, 이 나라는 세계에서 일인당 독서량이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낮은 나라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대학의 주위가 현재와 같이 환락가를 방불케 하는 상황도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며, 정부나 기업이 인재 선발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 것이고, 포퓰리즘 정치와 같은 말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이름만 대학이지 교육내용이 지극히 부실하고 운영이 파렴치한 장사꾼 수준의 대학이 너무나 많다고 한다. 중학교 수준의 영어도 하지 못하는 대학생도 상당한 수에 이른다고 한다.

  대학답지 못한 대학은 당연히 없어지거나 전문학교로 전환되어야 한다. 국가정책은 국가목적과 일치 여부나 도덕적 정당성 또는 장⁃단기 차원의 현실적 적실성과 관련된 치밀한 검토 후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결정되었을 경우 일시적인 부작용이나 특정 이해집단의 반발 때문에 시행이 유보되거나 집행과정에 왜곡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물론 그러한 검토의 철저함이다. 교육과학부가 제시한 ‘대학살생부’ 작성의 근거는 취업률, 장학금 수혜 정도, 교수 충원율 등 대학 운영에 고려하여야 할 여러 교육적 및 행정적 지표로 알려져 있다. 물론 그러한 지표는 당연히 대학의 유⁃부실 여부에 대한 판별의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지표만으로는 일단 ‘대학살생부’의 범위를 어떠한 수준의 대학에서 그칠 것인가 하는 정책결정에 직면하여 실천적인 판단근거를 제공하지 못한다. 그러한 지표에 입각한 정책시행은 대학의 숫자만 ‘적당히’ 줄이는 효과 이상을 거두지 못하며, 대학정책의 궁극적 목표인 대학을 진정으로 대학다운 대학이 되게 하기 위한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할 수 없다. 여기서 대학의 존재 이유가 무엇이고 대학교육의 본령이 무엇인지, 다시 말하여 대학이 진정으로 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단하게라도 성찰할 필요가 있다.         

  현재 한국의 대학 운영은 서구 대학을 모방한 것이고, 대학이란 명칭도 영어 ‘university’의 번역어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러나 ‘university’란 명칭은 ‘큰 배움’과는 거리가 먼 단순히 세속적인 ‘단체’를 의미할 뿐이다. 대학의 본령은 오히려 동양의 지적 전통에서 오래 전에 확립되었다. 말 그대로 대학은 ‘큰 배움’의 터전이고, 동양의 고전인 <대학>에 나타나 있듯이 ‘큰 배움’의 본령은 ‘명명덕(明明德)’, 즉 ‘밝은 덕을 더 밝게 하기’, 다시 말하여 기존의 정신세계를 확대 및 심화하고 기존의 판단 능력을 끊임없이 강화하는 훈련을 통한 덕인(德人)의 양성, 즉 총체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할 줄 아는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가진 인간의 배출에 있다. 그러한 정신세계의 핵심은 설사 스스로는 학문적 또는 예술적 창의력이 없더라도 진정으로 창조적이고 진정으로 새롭고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판별할 줄 아는 능력이다. 그러한 사고 능력은 오직 기존의 생각이 끊임없이 부정되고 논파당하는 고통 속의 즐거움을 겪는 과정을 통해서만 형성되며, 그와 같은 사고의 훈련과정에 대학교육의 본령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교육은 기술교육이나 수동적인 지식습득 교육과 구분되며, 대학이 전문학교나 기술학원과 구분되는 근거이다.   

  현재 한국의 대부분 대학은 그러한 의미의 대학교육을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상황이 지속된 데는 대학교육을 선도할 인문⁃사회과학에 주요 책임이 있다. 이제 한국의 대학은 스스로가 젊은 영혼을 방황하게 만드는 주범은 아닌지 반성할 때이다. 그들을 세속적 자기이익에만 집착하는 영악한 계산자로 만들고, 덕성의 함양과 교양의 형성을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는 영속적인 즐거움에서 소외시키고, 단편적인 지식의 습득을 배움의 전부로 착각하게 만들고, 경박한 수준의 쾌락을 삶의 즐거움 전부로 알게 함 등을 조장한 것은 아닌지 자책할 때이다. 대학생들 또한 취직의 고민은 하지만 사고의 고민은 하지 않고, 어려운 강의는 피하면서 소위 ‘학점관리’ 위주로 대학공부를 ‘속 편하게’ 해오고, 정작 자신을 똑똑하고 잘나게 만들려는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스펙이라는 ‘증명서 치장’에 열중한 것은 아닌지 반성할 때이다.

  개인이나 조직이나 진정한 자기발전의 시작은 언제나 자신의 모습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데서 비롯된다. 니체가 말했듯이 배움이 재미있는 이유는 언제나 그것에 부끄러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바로 ‘있음(einai; to be)’과 ‘봄(eidein; to see)’의 본원적 동일성은 서구 대학의 원형이자 대학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아카데미’를 창설한 플라톤 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