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권력(1) 고구려와 백제를 세운 건국 여제 소서노
여성과 권력(1) 고구려와 백제를 세운 건국 여제 소서노
  • 박선영 기자
  • 승인 2012.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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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불행했으나 대의는 이루다

 몽촌토성역, 석촌역, 암사역, 남한산성역……. 지하철 8호선 위에 역사책에서 본 듯한 낯익은 이름의 역들이 보인다. 8호선 노선도 위에는 6천 년의 시간이 담겨있다. 수천 년 전 신석기시대의 조상들이 암사동에서 집을 지어 살기도 했고 가깝게는 400년 전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사실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걸이 바로 풍납·몽촌토성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사상 유일의 여제(女帝)라 평가한 그는 바로 소서노다. 그는 국민 드라마 ‘주몽’을 통해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주몽)과 사랑을 나눈 여인으로 대중에 알려진 바 있다. 하지만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한 실질적 세력으로서의 소서노는 크게 조명된 적이 없다. 본지는 여인으로서는 불행했지만 고대 최초의 국모로서 카리스마를 보여준 소서노의 지도자적 면모를 알아봤다.

△뿌리 없는 이민자 주몽을 건국자로 만든 소서노

 소서노는 졸본부여에서 유력한 토착 세력이자 거상인 연타발의 외동딸이었다. 그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와 결혼해 비류와 온조를 낳았으나 일찍 과부가 됐다.

 그러던 중 주몽이 동부여 금와왕의 아들인 대소의 핍박을 피해 졸본부여로 망명해 왔다. 북부여 왕족에 속했던 소서노에게 북부여에서 망명해 온 주몽은 정적이었다. 그러나 소서노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야심찬 미래를 위해 주몽을 선택했다. 

 마을의 족장이었던 소서노는 남장을 하고 주몽을 따라다니며 건국 사업을 도왔다. 지역에서 쌓아온 명성을 이용해 인재와 백성을 모았고 충분한 재물로 성을 쌓고 무기를 제작할 수 있었다. 소서노의 도움으로 주몽은 마침내 고구려를 개국했고 소서노는 고구려의 황후가 됐다. 소서노는 주몽이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고구려 건국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왕은 친아들인 유리를 고구려로 데려와 그를 태자로 책봉했다. 소서노는 배신감을 느꼈지만 왕에게 매달리지 않고 미련없이 고구려를 떠났다. 아직 그녀에겐 많은 재산과 견고한 지지 세력, 그리고 새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야망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소서노의 희생적인 사랑은 주몽의 배신으로 끝났지만 그는 백제를 건국하며 역사상 유일한 여대왕이 됐다.


△소서노, 배신의 아픔을 딛고 백제를 건설하다 

  몽촌토성역 1번 출구를 나오면 넓은 풀밭이 펼쳐진 올림픽 공원을 볼 수 있다. 폐허가 된 한성의 옛 도읍터를 상상하며 몽촌토성역을 나왔지만 현재 몽촌토성은 88올림픽공원으로 조성돼 가족이 즐겨 찾는 나들이 코스가 됐다. 이곳은 한 국가의 도읍이었던 곳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많은 부분이 소실된 상태다.
 
그러나 이곳은 약2천년 전 소서노가 두 아들과 추종자들을 이끌고 내려와 문화국가인 백제를 일으킨 곳이었다. 공원에 남아있는 군사구조물과 구릉을 오르면 보이는 해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가 군사적 요충지를 건설하고자 한 소서노의 치밀함을 보여준다. 올림픽 공원 안에는 몽촌토성뿐만 아니라 백제한성박물관, 몽촌역사관이 위치해 있어 소서노가 일궈놓은 한성시대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소서노는 두 아들과 고구려 백성, 열 명의 신하를 이끌고 한산(漢山, 서울)에 도착했다. 신하들은 한강 남쪽의 땅이 비옥하기 때문에 그곳을 거처로 삼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남인 비류는 바닷가를 적절한 도읍이라 생각해 자신의 추종자를 데리고 미추홀로 떠났다.

 소서노는 자신의 뜻과 같은 온조를 도와 한강 이남에 백제를 세우고 하남위례성이라 칭했다. 그는 백제의 국모로서 남은 생애를 새 국가의 초석을 다지는 데 열정을 바쳤다. 8호선 위 몽촌토성, 풍납토성, 석촌을 배경으로 하는 한성의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한성 시대의 유력한 도읍지로 인정받고 있는 풍납토성·몽촌토성

 역사서는 소서노가 백제를 건국하며 정한 도읍을 하남 위례성이라 기록한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하남 위례성’의 실제 위치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서울 송파구와 경기도 하남시는 하남 위례성이 있던 자리가 서로 자기 지역이라고 논쟁해왔다. 그 결과 서울 송파구는 한성백제문화제를, 경기도 하남시는 이성문화축제를 개최해 한 지명을 두고 두 개의 축제가 열리는 일이 발생했다. 이는 서울 강남 위치설과 하남시 교산동·이성산성 위치설로 대립한 학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송파구 풍납토성의 발굴로 인해 소서노가 나라를 세운 곳은 풍납토성·몽촌토성이라는 학설이 우위를 갖게 됐다. 천호역 10번 출구에서 나와 올림픽대로 방면으로 걷다 보면 나오는 풍납토성은 모르고 볼 경우 휑한 잔디밭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한 나라의 도읍이라고 하기엔 초라하기까지 한 이곳을 발굴한 결과 풍납토성이 하남 위례성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들이 발견됐다.

 첫째, 풍납토성은 유실된 벽까지 합하면 약 3.5km에 달하는 거대한 토성으로 초기국가의 도성으로 충분했다. 둘째, 풍납토성이 한강을 끼고 있는 구조가 국가 운영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강을 끼고 축조된 다른 나라의 도성과 유사하다. 셋째, 국가 차원에서 행해진 제사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제사 유물들이 출토됐다. 넷째, 궁성이나 사원 같은 고급 건물에서만 사용되는 고대 기와, 고급 용기 등이 발굴됐다. 


△주몽의 둘째 부인이고 재가했다는 이유로 역사적으로 인정받지 못해
 
 소서노는 뿌리 없는 이민자에 불과했던 주몽을 남편으로 맞아 힘을 키워줌으로써 고구려를 있게 했다. 주몽의 배신에도 그를 응징하기보다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진정한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그간 주류 역사는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자로 오직 주몽과 온조만을 인정했다. 소서노는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주몽의 두 번째 부인으로 잠시 언급될 뿐이었다. 심지어 ‘고구려본기’는 소서노를 기록하지 않았다. 또한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소서노가 백제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 핵심적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소서노를 기록에서 누락했다.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사관(史官)이 대부분 남자였으며 사회의 주류 역시 남자였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고대국가의 건국시조가 남성인 점을 보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둘째는 고구려가 유리왕의 생모가 아닌 소서노를 아예 기록에서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소서노는 고구려를 떠나 백제를 세운 온조왕의 어머니였기에 고구려사에 등장할 수 없었다. 셋째는 유교적 사관에서 소서노가 매우 위협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사관들은 재가를 했을 뿐 아니라 왕이었던 남편에게 결코 순응하지 않았던 소서노에게 불편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여권이 신장된 현재 소서노를 단순히 개국을 도운 조력자보다는 진정한 건국자로서 평가하려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사학계에서는 소서노를 배제한 정치사회학에 대한 반성적 연구와 소서노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전문적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지금까지 소서노가 고구려와 백제를 건설한 공로가 소서노의 남편 주몽과 아들 온조에게 돌아갔다면, 이제는 2개의 민족국가를 일으킨 소서노의 리더십이 주목받는 때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