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잠을 깨우는 라디오 뉴스. 밤사이 곳곳에서 일어난 결코 반갑지 않은 소식들은 내게 그 어느 알람보다 효과가 있다. 아무리 세상 살기 퍽퍽해졌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싶을 정도의 사건 사고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온다. 최근엔 서울 중곡동 살인사건, 여의도 칼부림 난동 사건 등 목불인견의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범죄자가 앙금을 품은 사람을 대상으로 보복한 사건이 아닌, 불특정 다수를 범죄 대상으로 여기는 이른바 ‘묻지마 범죄’다. 무고한 시민들도 모두 피해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저 잔인한 사건이라고만 명명하고 넘어가선 안 된다. 추가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사건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할 때다.

  원래 범죄 수사의 출발점은 ‘모든 범죄에는 동기가 있다’는 명제다. 그러나 1888년 가을, 런던에서 일어난 ‘살인마 잭’ 사건을 필두로 위의 명제에 어긋나는 일들이 발생했다. 자칭 ‘잭’은 아무 개인적 이해가 없는 매춘부 5명을 엽기적인 방식으로 살해했다. ‘살인마 잭’ 사건은 범죄의 원인이 보복과 복수가 아닌, ‘화풀이’라는 점에서 요즘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범죄와 일맥상통한다.

  데이비드 바래시는 <화풀이 본능>에서 화풀이는 특정한 사람만이 하는 행동이 아닌, 인간과 동물 모두가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행동이라 말한다. 특히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동물일수록 화풀이 성향이 강하다. 타인으로부터 혹은 사회로부터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을 때, 그 모멸감을 씻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홀로 패배감을 느꼈을 때 ‘난 결코 약자가 아니다.’고 사회에 증명하고자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해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소외’다.

  현대 사회에서 ‘소외’는 일차적인 원인에 있지 않다. 물신주의, 끝없는 경쟁주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산물이다. 사회는 점점 병들어가고, 그 속에서 개인은 쉽게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산다. 그 중에서도 은둔형 외톨이, ‘히키코모리’는 ‘묻지마 범죄’를 충동적으로 저지를 수 있다. 스스로를 사회가 낙인찍은 사람이라 생각해 그 어떤 사람들과도 마주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소외는 점점 깊은 상흔으로 남아 결국 그들은 주야가 바뀐 생활을 하고, 인터넷 중독, 더 나아가 음란물과 폭력물에 중독돼 일상과 가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

  점점 사회에게, 개인에게 마음을 열어야 할 때다.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 인간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마는, 그렇다고 소외감을 방치해둬선 안 된다. 사회는 어느 한 사람 예외 없이 모두를 필요로 한다. 나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모든 희망을 손에서 놓아버리기 전에, 다시 한 번 희망의 끈을 있는 힘껏 쥐어봐야 한다. 소외를 느끼는 이유는 모두가 천양지차겠지만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사회는 결코 혼자 사는 공간이 아니라는 말을 되놰 스스로를 다독여보자. ‘공동체 사회’를 다시금 회복하면, 모두가 지니고 있는 ‘화풀이의 본능’도 이성적으로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올 가을 아침엔 무고한 타인에게 손을 휘두른 흉흉한 뉴스를 듣고 싶지 않다. 타인에게 손을 내민 따사로운 뉴스만 가득 듣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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