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의 ‘기생’은 편견에 가려 예술 문화를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기생들은 1927년 ‘장한(長恨)’이라는 동인지를 만들기도 했다. 이수광의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기생들」, 이은식의 「기생, 작품을 말하다」, 정병설의 「나는 기생이다」 등의 책을 통해 시대적인 계급 구조 때문에 한을 안은 채 살았던 조선시대 기생들의 삶의 모습을 살펴본다.

△춤과 노래를 갈고 닦은 예술인, 예기(藝妓)

「기생, 작품으로 말하다」에 따르면 조선시대 기생은 국가에 의해 관리되고 각종 행사와 외빈 접대에서 가무와 예능을 담당하는 예술 집단이었다. 조선말에는 기생도 ‘일패’부터 ‘삼패’까지 계급이 나뉘어 있었는데, 일패기생은 보통 유부기(有夫妓․서방이 있는 기생)로서 소리, 문학, 그림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전통 가무를 전승하는 예술인이었다.

세종은 3대 악성(우륵, 왕산악과 함께 한국 국악사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3명)으로 꼽히는 박연을 시켜 궁중 행사에 사용되는 모든 음악과 사용되는 악기, 악보를 만들고 정립했는데 이를 후대에 전한 사람이 기생이었다. 한양 기생 초요갱은 뛰어난 가무능력을 인정받아 예조 산하의 음악 연구원인 ‘전악서’에 들어가 조선 제일의 예술가이자 박연의 유일한 아악 전수자가 됐다.

초요갱은 단종 때 수양대군과 그 반대파들 사이의 정권 다툼에 말려들기도 했지만, 뛰어난 예술성 덕분에 형을 피할 수 있었다. 초요갱은 평원대군, 화의군, 계양군 등 왕족과 ‘상피붙은(근친상간)’ 죄도 추궁받았지만 홀로 처벌을 피했다. 신하들은 상소문에 “초요갱은 세종조에 새로 제정한 악무를 홀로 전습하였고 다른 사람은 이를 아는 자가 드무니 내칠 수가 없습니다”라고 적었다.

보천(지금의 경북 예천) 기생 가희아는 가무 실력 때문에 옹주(고려․조선시대 국왕의 첩 또는 서녀에게 주는 작호)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당시 궁궐에서 춤과 노래를 할 수 있는 것은 전국에서 뽑혀 올라온 상기(上妓)뿐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희아는 장기인 포구락 정재(고려․조선 때 가장 인기 있던 궁중무용)를 선보여 태종에게서 조선시대 최고의 찬사로 사용되던 ‘가관이다’라는 평가를 얻었다. 1413년 태종실록에는 “혜선옹주는 보천의 기생 가희아였는데 처음부터 가무를 잘 하였기 때문에 총애를 얻었다”고 나와 있다. 춤추는 능력을 인정받아 가장 천한 기생에서 후궁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수광 작가는 저서에 “태종 이방원도 가희아의 치명적인 매력에 빨려들어갔다”며 “가희아의 정재(옛 우리나라 궁중 무용) 실력은 임금도 어찌할 수 없었다”고 적기도 했다.


△나라에 충성하고 의로움을 알았던 의기(義妓)

기생방의 기적에 이름을 올린 동기(童妓)는 기생 수업에서 가무뿐만 아니라 사서오경 등 책을 읽으며 유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당시 여성들은 유교를 공부하는 것이 금기였지만 기생은 천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금기에서 벗어나 학문을 할 수 있었다. 천한 신분임에도 나라에 충성하는 기생의 모습은 이러한 유교적 소양을 바탕으로 해서 나타날 수 있었다.

평양 기생 계월향은 임진왜란 때 잠자리에서 일본 장수의 목을 벴다. 계월향의 남편은 무과에 장원급제했으나 신분 때문에 파직당한 김경서였다. 계월향은 김경서를 오빠라고 속이고 술자리에 들어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하와 동침했다. 김경서가 잠든 그의 목을 벴고 두 사람은 적장의 목을 숨겨 도망치다가 발각됐다. 계월향은 김경서를 도주시키고 죽었고, 김경서는 공로를 인정받아 후에 병마절도사 자리까지 오른다.

왕을 비판하고 민생을 살피라며 나라를 염려해 유학자 못지않은 상소문을 쓴 기생도 있었다. 용천 기생 초월은 15세의 나이에 헌종에게 장문의 상소문을 올렸다. 심희순의 첩으로 들어간 자신에게 헌종이 숙부인의 첩지(신분을 나타내는 머리장신구)를 내린 것을 사양하면서 시작한 상소문은 고을 수령의 뇌물 수수, 환곡 제도의 폐단 등을 조목조목 꼽아 비판한다. 초월은 “있는 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없는 자는 더욱 가난해지니 이는 전하의 탓이옵니다”라며 “대역무도한 말을 지껄이는 신을 서소문 앞에서 능지처참하옵소서”라고 적었다. 사대부가 아닌 천한 여성이 왕의 실정을 엄한 어조로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 것은 승정원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결국 왕에게는 올라가지 않았고 실록에도 남지 않았지만 대신 기생이 올린 상소문으로 인구에 회자돼 글이 전해진다.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기생들」에 따르면 광해군의 정비인 중전 유씨가 올린 상소문도 실록에는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여성의 상소는 불가능하던 시절이었다.


△재색을 겸비해 유학자들과 나란히 선 재기(才妓)

수없이 많은 유학자들이 아름답고 재주 많은 기생들에게 반해 로맨스를 만들었다. 가부장제 하에서 가정을 위해 감정과 욕망을 절제해야 했던 다른 여성들에 비해 기생들은 자신의 재주를 가지고 보다 자유롭게 사랑을 할 수 있었다.

퇴계 이황은 단양 군수로 부임했을 때 강선대에 올라 기생 두향과 시를 대작(對作)했다. 두향의 시적 능력은 대학자 이황과 겨룰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백성들의 가난을 해결하지 못해 고민하던 이황을 위로한 것이 두향의 유려한 시와 거문고였다. 이황은 두향을 정인처럼 귀하게 여기며 “너는 나를 기쁘게 하는 여인이구나”라고 칭찬했다.

“이화우 흩날릴 제/울며 잡고 이별한 님/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노매라” 37세에 요절한 부안 기생 매창의 시다. 10세에 처음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황진이, 김부용과 함께 3대 시기(詩妓)로 불렸다. 야사에 따르면 매창은 하루 밤에 찾아온 손님이 많으면 시를 짓도록 청해 제일 뛰어난 남자와 동침하기도 했다. 매창은 당대 유명한 시인이었던 유희경, 율곡 이이와 성흔의 제자였던 이귀,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 등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과 시를 나눴다. 매창과 10년을 벗으로 지낸 허균은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시원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다”며 평하기도 했다. 매창은 유희경과 처음 만난 지 15년 후에 다시 만나 3년 간 같이 살았지만 해수병에 걸려 한양 생활을 할 수 없게 됐다. 유희경은 국책을 맡아 한양을 뜰 수 없었고, 매창은 고향인 부안에서 “묻노니 인생은 몇 년이나 사는가/가슴에 한이 서려 울지 않은 날이 없소”라는 마지막 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이은식 박사는 저서에서 “유희경은 흙도 채 마르지 않은 그녀의 무덤에서 흐느껴 울었다”며 “운명은 예측할 수 없으니 가슴에 맺힌 한은 더욱 길고 슬펐으리라”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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